Brand LAB: GIVENCHY
5년 전, 타고 가던 택시 안에서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의 부고 기사를 봤다. 리카르도 티시(Riccardo Tisci)의 GIVENCHY가 막을 내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밀려나고 있던 때였다.
옆에 있던 친구와 지방시의 죽음에 관한 짧은 대화를 나눴다. 자세한 대화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방시가 살아오면서 겪었을 브랜드 GIVENCHY의 역사에 대해 짧게 생각했던 것 같다. 위베르 드 지방시가 사망한 이후에도 GIVENCHY에서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까? 하면서.
보통 창립자의 사망은 브랜드에 큰 영향을 미치고는 한다.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은밀하고 퇴폐적이면서 동시에 예술성을 짙게 드러내던 GIVENCHY는 이후 많은 변화를 맞았다.
그러나 지방시의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현재까지도 변하지 않고 이어지는 무언가는 분명 있을 것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내려온 GIVENCHY의 모습을 함께 탐구해보자. 위베르 드 지방시의 유산을 파헤치듯.
1927년 원단 공장을 운영하는 귀족 집안에서 위베르 드 지방시가 태어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형형색색의 직물에 둘러싸여 직접 보고 만지며 후에 만들어질 옷을 상상했다. 또 어머니가 즐겨보던〈보그〉를 보며 드레스를 그려 인형에게 입히기도 했다. 가족들은 그가 법학을 전공하기 바랬지만 어릴 때부터〈보그〉를 즐겨읽던 소년에게 법학은 너무 거리가 멀었다.
파리 보자르 ©Beaux-Arts de Paris
위베르 드 지방시는 패션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 보자르에 합격해 진학했다. 파리 보자르는 현재까지도 프랑스 최고의 미술대학으로 손꼽히며 순수 미술 분야에서는 세계 최상위권 대학으로 평가받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외모도 훌륭할 뿐더러 키도 190cm이 넘었는데, 미술적 재능도 훌륭했던 모양이다. 아마 지금 시대로 치면 금수저 엄친아가 아닐까?
이후 위베르 드 지방시는 다양한 브랜드에서 경력을 쌓은 뒤 마침내 25세의 나이로 브랜드 GIVENCHY를 설립한다. 아마도 그때의 그는 몰랐을 것이다. 이후 GIVENCHY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며 자신이 사망한 뒤에도 계속해서 브랜드가 세상에 남아 아름다움을 선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GIVENCHY YOUTUBE
위베르 드 지방시가 처음 일한 곳은 디자이너 자크 파트(Jacques Fath)의 의상실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지원한 곳은 아니다. 그 이전에 그를 거절한 사람이 있다. 바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obal Balenciaga)다. 지방시는 애초부터 발렌시아가를 존경했다. 그러나 발렌시아가는 지방시의 드로잉을 보고 “감각은 마음에 들지만 경력이 없어서 일할 수 없다”며 지방시를 돌려보낸다. 그 이후 지방시는 자크 파트 아래에서 일하며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과 피에르 발망(Pierre Balmain)을 만나게 된다.
프랑스 오트쿠튀르에 많은 영향을 끼친 디자이너 자크 파트
자크 파트, 스키아 파렐리(Schiaparelli) 밑에서 경력을 쌓은 위베르 드 지방시는 1952년, 파리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GIVENCHY를 오픈한다. GIVENCHY를 오픈한 직후 그는 미국에서 발렌시아가를 만나게 되는데, 그 둘은 미국에서의 만남 이후 급격히 친해진다.
당시 주변인들의 말에 의하면 발렌시아가는 주변인들에게 조언하고, 가르쳐주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런 발렌시아가를 존경하고 따르던 지방시였으니, 그 둘의 만남은 멘토와 멘티로서 둘도 없는 천생연분인셈. 지방시는 발렌시아가가 얼마나 좋았으면 미국에서의 만남 이후 GIVENCHY 살롱 마저 발렌시아가의 살롱 맞은편으로 옮긴다.
아버지를 3살에 여읜 지방시는 발렌시아가를 아버지처럼 따른다. 발렌시아가 역시 지방시를 가족처럼 받아준다. 자신의 스케치까지 지방시에게 공유할 정도였으니. 심지어는 1968년 발렌시아가가 자신의 살롱 문을 닫을 때 단골 고객들에게 지방시의 고객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엔 디자이너들끼리의 경쟁이 심하고 지금보다 더 폐쇄적이었던지라 이 둘이 보여준 ‘환상의 콤비’는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젊은 시절 모습 ©The Guardian
발렌시아가의 가르침을 받은 지방시는 먼 훗날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을 만나 여러가지 조언을 해준다. 발렌시아가가 그랬던 것처럼. 이브 생 로랑이 지방시에게 보냈던 편지에는 “당신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나를 꿈꾸게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16살의 이브 생 로랑이 패션 디자인 대회에 참여에 입상했을 때 당시 심사위원이 지방시였다. 그때부터 둘의 인연은 시작된 셈이다.
특히 이브 생 로랑은 동료 디자이너들과의 교류 없이 폐쇄적인 업무방식을 선호했는데, 그런 그도 지방시만큼은 존경했다. 발렌시아가에서 지방시로. 지방시에서 이브 생 로랑으로. 패션계의 역사가 계속되며 세대가 변해도 디자이너들 사이에 내려오는 유산은 현재까지도 변함없이 유효할 것이다.
공식석상에 참여한 지방시와 이브 생 로랑의 모습 ©GETTYIMAGES
발렌시아가는 지방시 평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보다 더 소중한 인물이 있다. 이름하여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지방시 인생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네임밸류가 만만치 않다. 영화로 제작한다면 할리우드 스타들이 총출동하는 초호화 캐스팅이어야 실제 이야기에 걸맞을듯 하다.
오드리 헵번은 지방시 살롱에 방문해 맞춤복을 주문하지만 지방시는 오드리 헵번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다음 컬렉션 준비로 바빴기 때문에 주문을 거절한다. 후일담으로는 지방시가 오드리 헵번을 당시 유명 배우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으로 착각하고 오드리 헵번이 온 것을 보고는 실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오드리 헵번은 앞으로 있을 운명을 직감이라도 한 것인지, 물러서지 않고 지난 시즌의 드레스라도 보여주기를 요구한다. 지방시는 오드리 헵번에게 기성복을 보여줬고, 그 중 하나를 오드리 헵번이 고르는데…
그 옷이 바로 사브리나에서의 오드리 헵번이 입은 사진 속 드레스다. 이후에도 오드리 헵번은 영화를 계약할 때마다 자신이 지방시의 옷을 입어야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오드리 헵번의 ‘지방시 고집’ 덕분에 지방시는 최초의 영화 의상 협찬 브랜드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당시에는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같은 섹시하고 화려한 이미지의 스타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그에 비하면 오드리 헵번은 키크고 마른 이미지였을 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항상 검소한 생활 습관을 보여주어 시대적인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방시도 마찬가지로 당시 식사도 굶으며 코르셋을 차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 모래시계 같은 몸매를 과시하던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몸이 옷 모양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옷이 몸의 개성을 따라야 한다는 철학 아래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는 정형화된 아름다움은 없고, 누구나 각자 자신만의 우아함이 있다고 믿었다. 또 “우아함의 비밀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둘의 만남 이후 오드리 헵번이 지방시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나오면서부터 시대의 여성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둘의 만남은 시대를 바꾼 만남인 셈이다.
베네티 블라우스 ©GIVENCHY
©LIFE
©GIVENCHY
그 이후 둘은 항상 붙어다니며 서로에게 조언을 구했고 서로를 응원했다. 마침내는 약혼까지 했으나, 서로의 우정과 관계를 위해 결혼을 취소했다고 한다. 다만 결혼을 취소했을 뿐이지 둘의 관계는 전보다 더 돈독해져 오드리 헵번이 먼저 사망할 때까지도 둘은 함께한다. 오드리 헵번이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순간에도 지방시는 그녀를 끌어안은채 오열하고, 장례식 때는 그녀의 관을 직접 운구한다. 그들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사랑보다 더 큰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던 것 같다.
“나는 내 인생에서 두 가지의 크나큰 특권을 누렸다. 그건 바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오드리 헵번이다”
위베르 드 지방시는 1988년 LVMH에 자신의 브랜드를 매각하고나서도 디자인을 이어가다가 1995년에 완전히 은퇴한다. 이후 교외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미술품들을 수집하며 지내다 평화롭게 눈을 감는다.
2편에서 계속.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