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꿈을 잘 꾸는 사람

작가정신 작정단 14기, 첫 번째 ≪세주의 인사≫

by 젊은최양

단 몇 페이지만으로 '외국인 작가가 보는 낭만적인 서울에의 이야기' 정도로 한줄평을 했던 르 클레지오의 ≪빛나: 서울 하늘 아래(2017)≫가 떠올랐다.



"빛나 씨 이야기가 맘에 들어요. 나도 조 씨의 비둘기처럼 도시 위를 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무척 가벼워진 느낌이에요. 하지만 나는 이름들을 알고 싶어요."

처음에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이름이요? 무슨 이름이요?"

"비둘기들이 날아다니는 동네 이름 말예요. 그 이름들을 말해 줘요."

그래서 나는 이름들을 만들어냈다. 이 도시에서 내가 아는 동네들 이름을 말해 주었고, 때로는 존재하지 않는 동네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 꿈속에서 어렴풋이 본 듯한 동네 이름을 지어내기도 했다.

서울셀렉션의 《빛나》 p.35



≪세주의 인사≫는 빛나가 살로메에게 해주는 그다음 이야기 같다. 지어낸 동네의 이름으로 가득한 지어낸 이야기인 것 마냥 꿈처럼 공상적, 환상적이고 꿈을 잘 꾸는 인물이 등장한다.



할아버지는 세주를 무릎에 앉혀놓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얘기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세주는 배를 탄 것처럼 멀미를 느꼈다. 얘기를 듣다 눈을 감고 졸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꿈으로 생생하게 이어졌다. 꿈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들은 마치 작은 엽서 같았다. 할아버지가 배를 정박한 곳에서 그 나라의 풍경이 그려진 엽서에 글을 써서 보내준 것 같은. 물론 할아버지는 엽서를 보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세주는 상상 속 엽서를 차곡차곡 모으며 언젠가 엽서에 나오는 삶을 찾아 떠나기로 다짐한다.

작가정신의 《세주의 인사》 p.70

KakaoTalk_20250603_013720357.jpg




#멀리떠나도다른건없다


동하 씨, 냉장고를 부탁해. 화분도. - 세주



늘상 숨어버리는 쪽을 택하는 세주를 처음 만났다면 ≪지구에서 한아뿐≫에서의 본인의 껍데기까지 버린 채 외계로 떠난 경민이 연결되기도 하겠지만,



그러니 어쩌면, 한아는 이제야 깨닫는 것이었는데, 한아만이 경민을 여기 붙잡아두던 유일한 닻이었는지 몰랐다. 닻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유약하고 가벼운 닻. 가진 게 없어 줄 것도 없었던 경민은 언제나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종국에는 지구를 떠나버린 거다.

난다 출판사의 《지구에 한아뿐》 p.146




나그네 인생에서 타인의 어떤 곳에 잠시 정박하는 것을 감사할 줄 알고

#머물게해줘서고마워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으로 지상의 반대편으로 노를 젓지 않고 다시 강변으로 밀려왔다는 점에서

#모든세계의끝에는시작이있어




오히려 ≪지구에서 한아뿐≫에서의 40퍼센트 정도는 광물인 사랑꾼과 ≪환생꽃≫(드디어 내 글에서 언급한다. 정말 좋은 단편.)에서의 '차이'라 불리는 사랑꾼이 어렴풋 나타난다.



그리고 반해버린 거지.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반하는 바람에, 우리 별 전체가 네 꿈을 꿨던 거? 하지만 첫 번째로 널 보고 널 생각한 건 나였기 때문에 내가 온 거야.

난다 출판사의 《지구에 한아뿐》 p.101



몸의 감각이 아스라했고 그건 다시 꽃의 꿈으로 이어졌다. 본색을 드러낸 꽃들이 세상을 활보한다. (중략) 난 왜 아직도 살고 싶을까. 살고 싶어도 되나. 이미 지옥이나 다름없는 이승에서 무엇을 위해 생명을 이어야 하나. 눈물은 증발했다. 인간에게 눈물은 사치다. 인간은 신에 가까운 것들을 수없이 죽였다. 그 결과 더 많은 신들이 태어났다. 아마 너도 저 너머에서 꽃의 신이 되었을 테지. 경계와 차원을 넘나들고, 더 많은 사랑을 피우는 존재로 진화했겠지. (중략) 이마에 붉은 인을 찍고 불꽃 같은 왕관을 두른 너, 꽃처럼 수많은 팔다리를 펼치는 네가······ 이곳의 여왕이다.

위즈덤하우스의 《환생꽃》 p.44


난 다시 강변으로 밀려갔다. 여전히 생이 철저하게 날뛰는 저 땅으로. 꽃 같은 태양 빛만 인간의 얼굴들을 비추었다.

같은 책, p.108





닻과 돛


세주가 밤에 꿈을 잘 꾸는 사람이라면 동하는 닻을 내린 사람이다. 그 닻은 처음에는 냉장고 옆에 떨어져 있던 분홍색 포스트잇이었고, 그 다음에는 빨간 냉장고였고, 그 다음에는 그 속에 든 책들이었으며 동시에 화분이었다. 식물이 잘 자랄수록 닻은 더 크고 무거워졌다. 화분은 받침대에 올리니 손이 아프지 않았다. 화분도 동하를 키웠다.


화분을 받침대로 받치고 좀 걸었더니 손가락이 아팠다. 받침대를 담아줬던 하얀 비닐봉지에 화분을 집어넣고 걷자 걸음이 빠른데도 화분은 안정된 자세로 흔들렸다. 손도 아프지 않았고, 화분이 무겁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비닐봉지 손잡이를 벌려서 화분을 들여다봤다. 여름휴가 동안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는 계획은 이미 무산되고 말았다. 이 작고 여린 새순 때문에. 그 전에 세주의 냉장고 때문에.

작가정신의 《세주의 인사》 p.26


하루 종일 같이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괜히 문샤인을 잘 기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우선은 잘 살려낸 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자라는 만큼 얘도 자라게 하고 싶었다. 얘가 자라는 모습으로 내가 보낸 시간의 길이와 넓이를 확인받고 싶었다.

같은 책, p.31



여기에서는 한강 선생님의 북향 정원이 생각났다. 무르익은 여인에게도 닻이 되어준 식물들. 닻을 내리고 뿌리를 내리고 힘껏 웅크렸다가 자라나는 식물들, 그리고 세주와 동하.


4월 4일

불두화와 단풍나무가 마치 시합을 하듯 키가 자란다. 간밤에는 불두화가 조금 더 자랐다. 낮에는 햇빛을 먹고 밤에는 자라나 보다, 식물들은. (사람 아이들처럼.)

문학과지성사의 《빛과 실》 p.111






낮에는 햇빛을 먹고 밤에는 꿈을 꾸는 사람들.


일부러 열어둔 문은 밤에만 마주치던 노란 눈을 낮에도 뜨게 한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아서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가만히 발을 들였다. 세주가 일부러 열어둔 거라는 걸 알았다.

작가정신의 《세주의 인사》 p.90


방바닥에 드리워진 정오의 햇살이 너무 샛노래서 마치 만개한 개나리꽃을 보는 것 같았다.

같은 책, p.98




≪빛나: 서울 하늘 아래≫에서의 빛나는 낯섦과 외로움이라는 감각에서 꿈을 꾼다.


≪지구에 한아뿐≫에서의 한아는 결국 버림으로 이어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경시를 받는다.

하지만 어떤 별 전체는 한아의 꿈을 꾼다.


≪환생꽃≫에서의 차이는 애인의 죽음으로부터 꿈을 꾼다.


한강 선생님은 우리네 역사 속 개인들의 고통을 공감하며 꿈을 꾼다.

이번에는 《빛과 실》로 거울로 볕을 반사해주어야 하는 북향 정원과 식물 이야기들 들려주셨다.


세주도 동하도 저마다의 아픔이 있다.

아픔으로부터 도망치려다가 제자리를 찾고 어두워지면 눈을 감고 꿈을 꾼다.

아픔의 경험은 나를 좀 더 나에게로 향하게 한다.

타인과 다른, 나만의 특별히 눈에 띄는 모습을 쌓아 올려준다. 아픔은 나만의 색을 빛낸다.

세주와 동하는 비슷한 이야기를 먹고 비슷한 노랑을 띄는 사람들로 더 자랄 것 같다.

지내는 곳이 북향이어도, 문샤인들이라 괜찮다. 볕이 꼭 필요할 때는 누군가 거울로 보내줄 것 같다.




덧)

나는 글을 '일단 쓰는 편'이다.

독서하며 끄적여둔 메모들만을 쭉- 훑고는

큰 갈피(구성) 정도만 잡고, '일단' 쓴다.

심지어는 제목만을 우선 정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번이 그랬다.

세주만을 보고 이 글의 제목을 정했다.

그런데 글을 쓰다가 엮게 된 이야기들의 인물들이 모두 꿈을 잘 꾸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는 물 중에서도 콕 집어 짭쪼롬한 '바다'를 헤엄치는 사람들이었다.

쓰다 보니 제목에 더 어울리는 글이 나와버린 거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누구나 품고 사는 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