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본 겨울나기
아득하게 멀어 희미한 어린 시절, 그래도 겨울의 순박함이 살아 숨 쉬는 나의 고향은 전형적인 한국 농촌의 풍경임을 자랑하고 싶다. 새해 벽두부터 눈 때문에 여름날의 장마처럼, 이렇게 길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코흘리게 어릴 적 내린 눈은 고요와 평화 그리고 추억의 보고였다. 하지만 콘크리트 상자 속에서 살아가는 도회지 사람들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눈이 오면 주차장으로 변하는 도로 때문에 관계당국은 욕을 먹기 십상이다.
온 세상이 무섭도록 하얗게 흰 가루로 단장을 하면 아침햇살이 반사되어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어서 손을 가리고 봐야 할 정도였다. 폭설이 내리면 집안에서 며칠 쉬는 것이 그 당시 겨울나기의 모습이다. 집집마다 땔감을 집채만 하게 장만해야 한겨울을 지내게 된다.
겨울방학은 시골 아이들을 산으로 향하게 한다. 바로 나무꾼이 되는 것이다. 땔감을 넉넉하게 준비한 집들은 긴 겨울을 든든하게 지낼 수 있었다. 지금은 기름, 가스보일러가 시골 부엌을 대신하여 한결 편하게 생활한다.
그때는 가끔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아궁이로 연기가 되돌아 나와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는 참으로 힘든 겨울을 보낼 때도 있었으나 아스라이 먼 옛날이야기 같이 낯선 것은 왜일까?
좋은 세상을 눈물로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지게를 손수 만드셔서 5일마다 열리는 읍내 장터에 내다 팔기도 하셨다. 장터에서 약주를 드시고 오실 때는 고등어 한 손이 온 가족의 군침을 돌게 한다. 지게를 지고 높은 산 서너 봉우리를 넘어가야 나무를 한다. 혼자 갈 때도 있지만 예닐곱 명이 같이 대장정(?)에 오를 때가 더 많다.
적막한 산허리에는 이내 적막을 깨는 톱질, 낫질, 장작을 패는 소리가 정감 있게 울려 퍼지고, 삽시간에 온몸에서는 땀이 배어 나와 생동감을 더하게 한다. 나이 많은 형들 쪽에서 콧노래가 선창처럼 구성지게 울려 퍼질 때는 어느 정도 작업이 마무리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불청객들의 한판 전쟁으로 놀란 꿩, 노루, 토끼 등이 춤추듯 달아나면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몰이사냥을 한다. 이산 저산 울려 퍼지는 고함소리는 천군만마의 발자국 소리 이상이다. 어느덧 지게에는 자기 키보다 훨씬 높게 땔감을 갈무리하여 겨울 산속의 적막함을 뒤로한 채, 산등성이 오솔길을 쉬엄쉬엄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집으로 향한다.
고즈넉하게 자리한 동네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큰 바위재 쉼터는 마지막 쉬는 장소로 온마을 사람들이 쉬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산 끝자락을 나는 '산평선'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물은 수평선, 땅은 지평선이니까 별 무리가 없다고 본다. 우리는 산평선 끝지점을 어림잡아 지명을 말하기도 하고 포부를 키우기도 했다.
이 집 저 집 굴뚝에는 저녁식사 준비로 무공해 연기가 춤추듯 얼굴을 내밀면 이미 뱃속은 '꼬르륵꼬르륵' 시장기가 발동한다.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속 깊은 놋그릇에는 그것도 모자라 봉긋하게 밥이 올려지고 길 떠난 님을 기다리듯 주인을 다소곳하게 기다린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맛있는 밥이 또 있으랴 싶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저녁식사를 끝낸 동무들이 늘 그렇듯이 우리 집 사랑방으로 삼삼오오 모여들고 아랫목을 서로 차지하려고 엉덩이 싸움이 벌어진다. 아! 보고 싶은 얼굴들... 시름없는 정담은 그칠 줄 모르고 밤이 점점 깊어간다. 배가 출출해지자 요깃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우리는 김치내기를 한다. 김치내기를 해서 지면 전쟁터에 나가듯 어쩔 수 없이 김치 서리를 가야 한다. 바로 겨울나기의 진면목이 펼쳐지는 것이다.
김치냉장고가 없던 시절, 발소리를 죽여가며 눈 덮인 마당에 볏짚으로 만든 예쁘게 목도리를 하고 있는 김칫독으로 다가간다. 김칫독 뚜껑이 떨겅거리지 않게 조심스레 열리고 살얼음이 방패막이를 하지만 무지막지한 손은 거침없이 전리품을 탈취해 간다. 아랫목에 덮어둔 밥그릇은 아직도 온기가 조금 남아 있다. 꽁당보리밥에 김치만으로도 모두 행복에 겨운 모습들이다. 그때 그 김치서리를 무형 문화재로 지정하면 어떨까 싶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즐거운 겨울나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 집 옆방에 세 들어 살고 있던 박순경 님이 노크도 없이 문을 덜컥 열더니 "야심한 밤에 너무 시끄럽다며 내일 낮 시간에 지서로 출두하라"라고 한다. 다음 날 우리는 지서에 가서 큰 죄를 지은 사람들처럼 훈계를 받고 돌아왔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고자질하자, 엄마는 박순경 님에게 "한집에 살면서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항변까지 하고서야 마무리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가 그렇게 잘못한 걸까? 싶다.
아버지께서는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온다'는 속담을 자주 말씀하셨다. 자기 집 앞 눈도 치우지 않는 세상, 설상가상이 설상가설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키며 올 겨울은 큰 위력을 발휘했다. 내린 눈이 녹으면서 처마 끝에는 고드름이 키재기가 한창일 때, 양지바른 담벼락은 아침 밥상을 물린 어른들이 차지하자 우리들은 썰매를 타거나 얼음지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
어떤 날은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물에 빠져 흡사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추위에 떨면서 집에 가면 어머님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추운 겨울 날씨에 감기에 걸릴까 걱정이 앞서기도 하지만 사실 갈아입을 옷이 마땅치 않은 이유 이기도 했다. 나는 이불 깔린 아랫목에 쏙 들어가 몸을 녹이면서 행복에 겨운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다.
참으로 유유자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폭설로 인하여 먹이를 찾아 민가로 내려오는 산짐승들에게 보시라도 해주고 싶은 만 간절하다. 도둑질도 해 본 놈이 하고, 고생해 본 사람이 고생의 참 맛을 알듯이 아금바른 나의 생활로 인하여 한양 입성 30여 년이 넘었지만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다.
나의 과거가 진한 향수로만 여겨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또 한 해를 보내고 또 한해를 맞이한 지금,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겨울은 추운 기온만큼이나 사람 사는 정만큼은 너무너무 따뜻한 계절이었음을 새삼 반추해 본다. 문명의 이기가 제 아무리 세상을 더 편하고 더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도 헐벗고 굶주리며 살았던 그때가 사람 사는 맛이 더 했다.
사람 냄새가 이토록 그립고 간절한 것은 비록 나 혼자만의 바람은 아닐 성싶다.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를 다시 활짝 펴고 지난날 추억을 밑거름 삼아 삶 터에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자.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에게 따뜻한 기억의 볼레길을 볼 수 있게...
이미지 출처 : Pixbay로부터 입수된 Alain Audet님의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