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면서 비로소 진짜 '나'를 만났다
퇴직 후 찾아온 고요함, '쓸모'의 기준을 묻다
어느덧 퇴직 4년 차. 이제는 집 안을 감도는 고요가 제법 익숙해졌지만, 퇴직 초기 얼마간은 밝아오는 아침이 차라리 공포에 가까웠다. 수십 년간 나를 흔들어 깨우던 알람 소리가 멈춘 자리에는 목적지 없는 하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은 찰나였고, 곧이어 낯선 당혹감이 밀려왔다. 세상의 모든 연락처에서 내 이름이 일제히 삭제된 것만 같은 기분. 그것은 자유라기보다, 사회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서늘한 자각이었다.
공직에 몸담았던 시절, 나의 존재 이유는 오직 지역의 안전과 행복에 있었다. 밤낮없이 울리던 호출은 고단한 업무라기보다 마땅히 응답해야 할 책무였다. 손에서 놓지 못하는 전화기는 공공의 안녕을 지키는 비상 연락망이었다. 타인의 요청으로 채워진 다이어리는 시민의 삶과 맞닿아 있던 시간의 기록이자, 공직자로서 감당해 온 역할의 증표였다.
그러나 어제의 소란이 무색할 만큼 거실은 적막해졌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제 나는 어떤 쓸모를 지닌 사람인가. 두려운 것은 소득의 감소가 아니라 역할의 부재였고, 더 깊은 것은 정체성이 비워진 자리였다.
몸은 여전히 건강하지만 사회의 호출은 멈췄다. 마치 나라는 존재의 유효기간이 끝난 듯한 상실감.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은퇴자들이 마주하는 공통의 벽이기도 하다.
쓸모는 직함이 아니라 '나눔'에서 나온다
▲대신 잠들기 전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울림이라도 주었는가.' ⓒ andrewtneel on Unsplash관련사진보기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쓸모'라는 단어를 너무 좁고 차갑게만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의 쓰임은 늘 조직의 성과표 위에서만 증명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조직의 문을 나서자, 숫자가 아닌 '관계'와 '기록' 속에서 자라나는 또 다른 쓰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이었다. 예전에는 결재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면, 이제는 세상과 마음을 나누기 위해 자판을 두드린다. 처음엔 내 소소한 일상이 과연 기사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삶의 조각들을 글로 풀어내자, 생각보다 많은 다정한 울림이 돌아왔다.
누군가는 내 글에서 위로를 얻었다 했고, 또 누군가는 잊고 지냈던 가족의 얼굴을 떠올렸다고 했다. 돈으로 셈할 수 없는 이 '글쓰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다시 사회와 다시 연결되는 효능감을 맛보았다. 이제 내 노트북은 차가운 업무 도구가 아니다. 세상을 향해 조심스럽게 내미는, 나의 가장 따뜻한 손바닥이다.
속도보다 깊이로, 지시보다 동행으로
퇴직은 쓸모의 종말이 아니라 기준이 바뀌는 지점이었다. 이제 나의 삶은 '속도'보다는 '깊이'를 지향한다.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는 마음을 나누는 '공감'에 가치를 둔다. 명령하고 지시하는 자리가 아니라, 기록을 통해 이웃의 곁을 묵묵히 걷는 '동행'의 자리에 서기로 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어디 소속이냐", "무슨 일을 하느냐"는 타인의 질문에 구태여 구구절절 답하지 않는다. 대신 잠들기 전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울림이라도 주었는가.' 그 질문에 희미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오늘도 나는 충분히 쓸모 있는 사람이다. 명함은 사라졌지만, 나는 이제야 비로소 명함 뒤에 숨겨져 있던 진짜 '나'라는 사람의 쓰임새를 찾아가고 있다.
은퇴는 쓸모를 다한 것이 아니라, 나의 진정한 쓰임을 찾아가는 새로운 무대로의 이동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파른 출근길을 지나, 이제는 세상을 향해 온기 어린 문장 하나를 건네려 서재로 향한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나의 '기꺼운 공헌'이 누군가의 지지대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의 출근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나의 서재는 이제 가장 뜨거운 일터이자,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린 소통의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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