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4년 차, 나에게 주는 가장 단단한 설빔
"올해 설빔은 뭘 살까?"
명절이 다가오면 으레 스스로에게 던지던 질문이다. 예전 같으면 백화점에 들러 빳빳한 셔츠나 단정한 니트 한 벌을 장만했을 것이다. 세배를 받는 어른으로서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젊은 시절의 설빔은 이렇듯 늘 '보여지는 나'를 위한 치장이었다.
그러나 은퇴 4년 차를 맞은 올해, 나는 조금 낯선 선택을 했다. 아내와 함께 장을 보던 마트에서 옷 대신 운동매트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서재 바닥에 펼쳐둘, 푹신하지만 단단한 한 장의 고무판. 설빔으로 삼기엔 다소 엉뚱한 물건이었지만, 계산대를 지나는 마음은 이상하게도 평온했다.
이제 나는 옷태보다 무릎의 안부를 먼저 묻는 나이가 되었다. 거울 속 실루엣보다 몸이 보내는 미세한 신호에 더 자주 귀 기울인다. 인생 후반전의 문턱에 서서야 깨달았다. 겉을 가꾸는 일보다 속을 다지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진짜 나'를 돌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생존을 위한 자산, '근테크'의 시작
은퇴는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을 가져갔지만 대신 ‘시간’이라는 거대한 자산을 남겼다. 문제는 이 자산의 운용법이었다.특별한 계획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면, 저녁 무렵 몸과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이제 건강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근육은 저축하지 않으면 무서운 속도로 인출되는 자산이다. 60대 이후 낙상 사고가 급증한다는 통계는 남의 일이 아니다. 은퇴 후 가장 위험한 것은 통장의 잔고 부족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습관’ 그 자체다. 우리는 재테크에는 열을 올리면서도, 정작 나를 지탱할 기초 공사인 ‘근테크’에는 인색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를 일시적으로 돋보이게 할 옷 대신, 나를 평생 지탱해줄 바닥을 사기로.
하루를 채우는 엄숙한 의식
서재 한가운데 매트를 펼치는 일은 생각보다 엄숙했다. 운동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을 내어주는 태도라는 걸 알았다. 매트를 펼치는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다.
"이제 오롯이 나를 돌볼 시간이다."
설날 아침, 떡국을 먹은 후 나는 매트 위에 섰다. 몸 전체 근육의 70% 정도가 모여 있는 하체를 자극하며 혈액 순환을 돕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했다. 새 옷의 감촉 대신 이마에 맺힌 땀 한 방울로 맞이하는 새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옷보다, 나 자신에게 보내는 응원이 훨씬 따뜻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홈트레이닝 앱을 켜고 몸을 움직인다. 처음 며칠은 쉽지 않았다. 굽은 어깨는 쉽게 펴지지 않았고, 플랭크 30초는 유난히 길었다. 팔은 사소한 바람에도 흔들리는 가지처럼 떨렸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매트 위에 눕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는 동안 세상의 소음이 조금씩 멀어졌다. 오직 나의 숨소리와 심장의 박동만이 또렷해졌다.
인생의 모든 계절을 지켜줄 옷
노화를 멈출 수는 없지만, 늦출 수는 있다. 근육에 투자하는 일이다. 근력이 떨어지면 낙상의 위험이 커지고, 와병의 시간은 길어진다. 생각하기 싫지만, 피하고 싶은 미래다. 그래서 근력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번갈아 하며 몸의 기초를 다시 세우려 한다.
누군가 “올해 설빔은 뭘 장만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할 것이다.
“샀죠. 이번엔 좀 특별한 걸로 샀습니다.”
이 매트는 내게 ‘올해도 잘 버티겠다’는 다짐이자, ‘내 두 발로 끝까지 걷겠다’는 선언이다. 화려한 옷은 한 철이면 유행이 지나지만, 매트 위에서 다진 건강은 남은 인생의 모든 계절을 지켜줄 것이다. 비록 화려하진 않지만 가장 단단한 준비.
오늘도 나는 서재라는 작은 무대 위에서, 인생 2막을 한층 더 견고하게 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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