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아무개 May 25. 2024

2. 비 오는 날의 동대문 (2)

동대문 표류기

잔잔한 노랫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식당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식견이 좁은지라 가사가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즈베크어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식당 이름이 ‘사마르칸트’이었거든요.

     

식당 사마르칸트의 깨끗하고 화려한 간판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 중동부의 한 도시로, 실크로드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라고 합니다.

실크로드는 여러 지역과 다양한 문화를 잇는 교역로이지만, 필자는 그것 하면 광활한 사막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거센 모래바람과 싸워가며,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안고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가로지르는 무역상들이 떠오릅니다.

그들이 올려다보았을 밤하늘을 상상해 봅니다. 쏟아질 듯 하늘에 가득한 별빛을요.


그들은 하늘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광활한 자연 앞에 한 없이 미미하고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이었을까요.

아니면, 이 세상은 틀림없이 신이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찬란한 아름다움이었을까요.


솔직히 퍽 우습지요.

고작 밥 한 끼 먹으러 와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자 나름의 일상을 여행하는 방법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에 작은 틈을 내어 나들이를 나가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세상의 모양을 봅니다.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요.

그러다 보면 문득 낯선 것을 보게 되고, 운이 좋은 날엔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던 어린 날의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어느덧 재미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철딱서니 없이 머리에 피만 말라갑니다.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마음만은 어리고 바보 같아요" 하는 것에 대해선 괜찮다고 말해주는 이가 없습니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채로 서툴게나마 어른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좋다고.

이대로 재밌지 않으냐고 진심으로 말해주는 법을 터득해 갑니다.


혹자는 "아직 앞날 창창한 놈이, 살 날이 산 날보다 많은 놈이 앓는 소리 한다~" 하실 수 있겠지만, 그런 분들도 아이고 철부지 고민도 많네, 하고 예쁘게 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

.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물과 함께 메뉴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깔끔한 식당 내부

식당은 깨끗했습니다. 물품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하루하루 정성스럽게 관리해 주었을 때 비소로 얻어지는 특유의 맑은 빛이 났습니다.

   

필자는 새것의 반짝이는 깨끗함도 좋아하지만, 위처럼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공간과 물품도 좋아합니다.


세월은 이야기이고, 잘 관리된 세월은 좋은 이야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런 곳에는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힘을 얻을 수 있는 기운이 있습니다.


메뉴판

모든 음식이 처음 보는 것들이라 주문에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고민 끝에 ‘슈르파’라는 양고기 스프, 감자를 곁들인 구운 청어 요리, 쇠고기 샤슬릭을 주문했습니다.         


마르꼬프 빠 까례이스끼(Морковь по-корейски)

밑반찬으로 당근 김치가 나왔습니다. 정식 이름은 ‘마르꼬프 빠 까례이스끼’, ‘마르코프차’ 등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마르꼬프 빠 까례이스끼’는 직역하면 ‘한국식 당근’입니다. 아픈 역사가 있는 음식입니다.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 당했을 당시 김치를 만들어 먹기 위해 탄생한 음식이라고 합니다.

  

포크로 몇 가닥을 집어서 입에 넣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삶거나 굽지 않은 듯한데 당근 특유의 맛은 아주 옅었습니다. 약간 짭조름하고 새콤달콤한 맛이 났고, 알싸한 향이 났습니다. 피클과 김치 중간 어딘가의 맛이었습니다.

현지에 맞게 맛이 변했다고 하지만, 모태가 한국인들에게서 나온 음식이어선지 낯선 느낌 없이 입에 잘 맞았습니다. 자꾸 손이 가는 맛입니다.


식당을 둘러보며 당근 김치를 한 줄, 두 줄 집어먹고 있는 와중에 드디어 메인 요리들이 나왔습니다.

                   

메인 요리들

아래 있는 국이 양고기로 만든 ‘슈르파’라는 음식이고, 그 위가 감자를 곁들인 청어 요리입니다.


청어 요리의 이름

메뉴판에 적힌 이름입니다. 세네카 씨 캅모코우..? 한국어 발음이 적혀있지 않아서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생선 기름 특유의 비릿한 향이 조금 있어서 호불호가 갈릴 듯합니다. 필자는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감자 위에 양파와 청어 조각을 올려서 한 번에 먹으면 궁합이 아주 좋습니다.


슈르파(양고기 스프)

슈르파는 먹으면 먹을수록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습니다. 고기 식감부터 스프 맛 모두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감자탕과 아주 비슷했습니다.


감자탕을 아주 맑게 끓이고, 들깨 가루 대신 고추기름을 조금 넣으면 아마 거의 같은 맛이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는 거의 없었고, 식감도 감자탕에 들어가는 돼지 등뼈와 비슷했습니다.


슈르파에는 숭덩숭덩 썰은 당근과 파프리카도 들어있었는데, 이것들 역시 매우 맛이 좋았습니다. 푹 끓여낸 스프의 국물이 과육에 깊이 배어있어서 씹을 때마다 야채의 풍미와 함께 스프가 흘러나왔습니다.

   

쇠고기 샤슬릭

음식을 먹는 중간에 쇠고기 샤슬릭이 나왔습니다. 열기가 느껴지는 철판, 30센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꼬치, 고기 표면에 아직 지글지글 끓고 있는 기름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맛 자체는 직화에 구운 약간 질긴 쇠고기 이상,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자체로 아주 훌륭하다는 두말할 것 없고요.


주문 전까지만 해도 너무 욕심을 부렸나 싶었습니다. 금전 문제야 이따금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여기며 넘어가지만, 양이 많아서 남기는 건 문제이니까요.


기우이긴 했지만요.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배가 남아서 '삼사'라는 고기가 들어있는 빵을 사 먹었습니다.

(깜빡하고 바로 먹어버린 탓에 사진은 찍지 못했습니다...)


근래에 했던 식사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식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식당과 거리의 분위기도 좋았고, 이색적이었던 음식들도 모두 입에 맞았습니다. 사실 애초에 가리는 음식이 거의 없긴 합니다.


이대로 돌아가긴 아쉬워서 주변을 더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한데 날이 제법 어두워져서 가볼 곳이 마땅히 없습니다. 지도 앱을 켜서 이곳저곳 보는데 DDP가 눈에 띕니다. TV나 유튜브에서만 보던 그 특이한 모양의 건축물을 두 눈으로 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를 두들기며 그곳으로 가는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

.

.


(다음 편에서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1. 비 오는 날의 동대문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