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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지몽 Sep 25. 2023

더이상 용두사미가 아니야

오늘 아침, 일찍부터 아이의 병원에 다녀와서 아내가 차려준 뜨끈한 육계장을 한그릇 마신 후였다. 아내가 나에게 갑자기 물어본다.


" 오빠. 요즘에도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지?"

" 응 그렇지"

" 우와. 나는 우리 아빠도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빠도 성실한건 참 존경할만한거 같아. "


쌀쌀해진 가을날 아침, 뜨끈한 국물을 마시고 포만감에 행복해 있었는데, 아내의 칭찬에 한층 더 포근한 기분이 든다. 나는 말없이 웃었고, 고맙다는 표시로 엄지척을 아내에게 내밀었다.


" 예전에는 용두사미의 느낌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한번 하겠다고 말한 일들을 꾸준히 해 오고 있는것 같아"


그랬나? 생각해 보면, 첫 직장에서 나의 세번째 상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긴 했다


" 너는 아이디어는 좋은데 끝까지 실행하는게 부족해"


그런 말을 들은 것을 보니, 내가 늘 추진력 있었던 사람은 아니었나보다. 되돌아 보면, 회사를 다니면서 참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결제를 받아서 해보고자 노력했던 일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그것이 번번히 이런저런 이유로 좌절되었다. 회의 라는 것을 열어서 무언가 좋은 아이디어 없는가를 외치던 상사들에게 나는 그 순간에는 참 유용한 녀석이었지만, 상사들이 그것을 경영진에 보고하고, 피드백을 받고, 실제로 그 일을 실행하는 단계가 길어지는 과정에서 처음 나의 아이디어를 지지해 주었던 뜨거운 온도가 점점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젔었다. 되돌아 보면 나의 아이디어는 막상 실행하기에는 급진적이고 위험부담이 높은 것들이 많았다.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회사에서 이를 실행하기에는 상사들이 느끼는 부담이 컸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 스탭을 해서 가져오는 나에게, 점점 검토할 수많은 경우의 수와 가지수를 채워올 것을 요구했고, 일상에 급한 일이 아닌 기획성 업무는 점점 시간과 함께 흩어져 갔던 것이다.


이런 일을 수차례 겪은 이후에는, 상사들이 수많은 사람을 회의실에 앉혀놓고 무언가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없는가를 물었을때, 나도 다른 사람들 처럼 회사 수첩에 맥락없는 낙서와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면 최대한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일해주는 척하면 그뿐, 내 열정이 또다시 시간이라는 용매에 점점 녹아버리는 꼴을 보기 싫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내던 삶이 바뀌었던건, 조금 작은 회사로 옮기면서 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환경에서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는 내가 아이디어를 내고 내가 실행하고 내가 이끌어 나가야 했기 때문에, 처음에 하고자 한 바를 끝까지 마무리 지어야 나의 성과와 효용이 증명이 되었다. 그래서 차근차근 시스템과 환경을 만들어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여러 기획성 업무로 살을 붙여 나갈 수 있었다.


그 시절, 박사학위를 마무리 했던 것도, 용두사미 인생을 끝내는 큰 전환점이었다. 그저 수료생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는 나의 말을 들은 아내가 나에게 지었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큰 돈과 많은 시간을 쏟은 박사과정을 끝내지 않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아내의 강경한 태도에, 아이가 나오고 코로나가 터지는 그 기간 나는 독하게 논문을 마무리 할 수 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지금,

회사생활에서 시작한 나의 아이디어거,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비즈니스가 되었고, 나보다 더 훌륭한 기획자를 만나서 그 아이디어가 체계화 되고 실행되고 있다,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 아내의 말대로 나는 더이상 용두사미가 아닌가 보다. 


" 그때 오빠 아이디어가 상사들을 부담스러웠을꺼야. 막상 실행하려고 하면 무서웠을수도 있어"


내 생각이 마무리 되었을때쯤 아내가 나에게 해준 말이다. 역시 핵심을 꽤뚫는 지혜를 가진 사람. 내가 용두사미가 더이상 아닌것의 가장 큰 요인은, 이사람이 아닐까 싶다.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때마다 손을 잡아주고 용기를 준 이 사람. 내 아내가 있어서 나는 오늘도 단 한걸음이라도 어제보다 전진할 수 있다.


(그런데 글을 쓰다보니, 이 글은 용두사미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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