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일을 좋아하는 편인데, 정확히는 광고 만드는 과정만.
첫 글부터 조심스레 고백할 일이 하나 있다.
몇 년째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인간 ENTJ인 내가 지금 가장 사랑하는 건 부끄럽지만 일이다.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싶고, 나 역시 진짜 미쳤나 봐 싶긴 한데 정확히 말하면 광고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 거지 나머지 '잡'일은 사실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고등학생 때부터 꿈꿨고 무리하게 편입을 하면서까지 광고홍보학과까지 들어가 결국 광고회사로 취업했으니 광고를 좋아해 온지도 벌써 17년쯤 되었다.
일을 해 온 10여 년 간 별의별 일을 다 겪어왔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AE 약어의 의미가 아(A).. 이것도 제가 하나요? 에(E).. 이것도 제가 한다고요?라고. 내가 상상한 광고와는 조금 많이 다른 일들을 해야 하는 건 참을 만했다. 눈앞에서 페이퍼를 던지는 무례한 광고주부터 소주 한 잔 기울이는 사이가 된 광고주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사람들을 만나며 광고란 이런 것인가? 하는 현타를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추잡하고 더러운(?) 일을 겪을 때마다 친구들에게 푸념할 때도 있었지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럼에도 광고를 언제나 사랑해 왔다는 점이다. 일로서의 광고, 나를 매료시키는 광고. 광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눈이 빛나고 미친 사람처럼 군다는 점은 동료 선후배라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나에게 최근 고민이 하나 생겼다.
일을 잘한다는 건 뭘까?
연차가 쌓이면서 스킬이나 관계에 대한 고민은 조금씩 소멸되고(물론 관계는 여전히 너무나 어려운 숙제이지만) 요즘 대두되는 테마는 바로 '일을 잘하는 방법'이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일을 할 때 효율적으로, 빠르게, 퀄리티를 내는 방법'.
이제는 한 회사에 머무르는 시대도 아니고 스스로의 경쟁력을 키워야 하는 시대임을 알기에,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눈여겨보고 있는데 그때마다 한정된 시간과 체력이 마음에 걸렸다. 예전에는 밤샘해도 끄떡없던 몸이 요즘은 10시만 되어도 누워야 하는 저질 체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30대 초반까지 비타민 하나 먹지 않고 버텼지만 요즘은 영양제 8~9알을 배송까지 시키며 몸을 챙겨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쯤 되자 스스로 지금까지 일을 해 온 스타일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아, 이제 나도 나이 들고 있나 봐.
그렇다면 일을 잘하는 순간들은 언제일까?
과거에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를 잘하거나, 내가 갖고 있지 않은 특정한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을 보며 으레 대단하다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휘황찬란한 말솜씨로 광고주에게 이거 사실 너네 잘못이야라고 돌려 말하는 저 말재간! 저 재치! 물론 이런 순간들도 일잘러가 돋보이는 상황이겠지만 최근 일잘러는 기본적으로 핵심을 꿰뚫는 사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핵심을 꿰뚫는 사람
연차가 쌓일수록 핵심을 파악하는 시선이 얼마나 중요한 역량인지 절실하게 느껴진다.
해결해야 하는 핵심 문제는 무엇인가?
소비자에게 필요한 해결안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는 광고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즐겨보는 오은영 박사님의 결혼지옥에서는 늘 이 구조로 솔루션을 찾아간다.
문제가 발생한 부부의 이야기를 확인한다.
두 사람의 성격이 왜 이렇게 형성되었는지를 중심으로 어린 시절을 탐색한다.
두 사람이 갖고 있는 핵심 키워드(불안, 애정결핍)를 활용한 솔루션을 제공한다.
매주 도파민 터지는 부부의 에피소드들이 나를 즐겁게 만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핵심을 파고드는 박사님의 솔루션이 마음에 쏙 들었다. 부부관계를 해결하는 데에도 핵심을 꿰뚫는 게 가장 중요한 역량이구나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 핵심을 꿰뚫는 방법은 뭘까?
최근 이 고민을 갖고 다양한 책을 보다가 이동진 저자의 <이동진 독서법>을 읽고 '요약하기'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저서에서는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힘이 중요하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초반에는 요약만 제대로 해도 굉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요약을 한다는 것은 그 책의 핵심을 간추린다는 얘기거든요. 그리고 구조를 파악한다는 얘기예요. 그러니 내용을 제대로 요약하기가 중요하죠. 이런 경험이 어느 정도가 쌓이면 비판적인 판단 기준이 나오죠.
제 생각에 그런 비판적인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군가와 토론을 하는 거예요.
/
줄거리를 말한다는 것은, 전체의 핵심을 보아낼 줄 안다는 거예요. 어떤 작품이든 그 안에는 수없이 많은 갈래의 이야기들이 있어요. 한 문단으로 줄일 때, 다섯 문단으로 줄일 때, 각각 자기가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추출해 내는 능력이 있어야 하거든요. 핵심, 패턴, 플롯을 볼 줄 알아야 해요. 이런 걸 다 보아내야 줄거리 요약이 가능하거든요.
내 일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제안서 : 1줄 이내로 요약하기. 내 관점을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면 베스트
책 : 책을 한 줄로 요약하기
사람 : 저 사람이 하려는 진짜 말의 의도는 뭘까? 요약하기
실제로 이 방법을 쓰면서 누구나 인정하는 말 잘러의 화술이 사실은 장황할 뿐 핵심이 없는 말이구나를 느낀 적이 있다. 요약을 하면 핵심이 보이고, 핵심을 중심으로 일을 하니 일의 속도가 올라간다. 남는 시간에는 나를 위해 투자할 수 있겠지?
핵심을 파악하고 일을 대하는 것.
오늘도 일을 통해 많은 태도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