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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일 Jan 31. 2022

불완전인간


시를 열심히 그리고 많이 쓰던 시절, 시로 친해진 친구들과 매주 서로의 시를 보여주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합평보다는 시로 떠는 수다에 가까웠고, 끝난 뒤 술을 마시며 서로에 대해 '캐릭터 해석'을 이어 나갔다. 만나는 족족 속내를 시리즈물로 들켜버리는 기분이었는데 의외로 싫지 않았다. 평소에 잘 보여주지 않는 내밀한 욕망, 결핍, 두려움. 그런 것들을 은근히 들키고 싶었던 걸까.


친구들은 내 시가 많은 것을 가리고 있다고 하면서도 용케도 내가 숨긴 것들을 잘 찾아내곤 했다. '너는 이런 사람이잖아'라고 다 파악한양 말하는 화법을 대체로 싫어하는 나인데, 이상하게도 그 친구들이 하는 말들은 좋았다. 내 자신에게조차 가끔 낯을 가리는 나자신에 대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대신 파악해 주는 것이 좋아서일까.


자신에게까지 낯을 가리는 속성 때문인지 나는 내면이 알고 싶어 술을 마시고 꿈을 뒤적인다. 어떻게든 '센척'을 해야 하는 에고를 가진 탓에 에고가 해체되는 순간의 나를 찾아 살피는 것이다. 술을 마시면 시가 쓰고 싶고, 시를 쓰면 나도 모르게 반복하는 말들이 있고, 그걸 대신 간파해주는 친구를 만나 팩트폭력을 듣는다. 하지만 술과 흑역사는 반드시 유의미한 인과를 가지는 탓에 조금 더 안전한 방식을 취하게 됐는데 그것은 바로 꿈. 자주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나는 내 보가트( 1 )를 찾는다.


반복되는 악몽 중 하나는 시험범위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한 채로 수학 시험을 봐야 하는 꿈이다. 시점은 고등학생 시절. 살면서 단한번도 이랬던 적이 없는데도 왜 이런 꿈을 반복적으로 꾸는지 알수가 없다. 다른 과목도 아니고 절대로 반드시 수학이다. 아마 내가 가장 약하다고 생각했던 과목이기 때문일 것이다. 꿈 속에서 나는 퍼뜩 깨어나며 오늘이 수학 시험을 보는 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시험 범위에 해당되는 교재를 아직 풀지 않아 텅 비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중요한 이벤트를 맞는 것. 그것으로 인해 결과를 망치게 되는 것. 고작 그것이 나의 보가트라니. 헤르미온느의 보가트와 동일한 동시에 K-범생으로 살아온 학창시절이 너무 투명하게 드러나서 어이가 없다.


자주 꾸는 또 다른 악몽은 바로 치아가 흔들리는 것. 꿈 속의 나는 마치 무엇인가를 온힘을 다해 견뎌내듯이 이를 앙다무는데, 그 결과 치아가 부러지거나, 잇몸이 약해져 치아가 빠지기 직전처럼 흔들리는 것을 직접 손으로 건드려 확인까지 해보는 것이다. 이 꿈은 꿈 속의 나뿐 아니라 실제로 자고 있는 현실 속 내게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 악몽을 꿀 때마다 실제로 안간힘을 다해 이를 앙다물고 있어서 턱이 빠질듯이 아플 뿐 아니라 꿈에서 깨는 순간 실제로 치아가 부러진 건 아닌지 확인해봐야 할 정도다. 무엇을 위해 꿈 속의 나는 그렇게 입을 꽉 다무는 것일까. 마치 무엇인가 쏟아내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 싶은 것처럼. 큰 고통을 견디기 위해 이를 앙다무는 것처럼.


결국은 나 자신에 대해 들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보가트인가 싶다. 꿈을 통해 나 자신의 유약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새어나가지 않도록 꿈 속에서도 안간힘을 쓴다. 현생에선 발산형 인간이라 어떻게 해서든 나를 효과적으로 드러내지 못해 안달인 나로서는 아이러니가 아닌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무엇인가를 맞고 그로 인해 나쁜 결과를 내는 것. K-범생이이자 K-엄마의 딸 K-장녀로서 유년의 내게 인정욕구는 구멍 뚫린 화수분 같은 거여서, 잘 보지 못한 시험지는 정말이지 악몽 같았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따위 것들에 I do not give a tiny rat's ass 라 외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이 살고 있지만, 에고가 해체된 내 속엔 아직도 시험 문제 하나 틀리는 것에 벌벌 떨고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교복 입은 열여덟살이 살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유약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하고 놓아주지 못하고, 외부와 타자에게서 칭찬과 찬사를 찾아야만 과제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인 것이다. 인정이라는 행위를 행하는 주체는 인정을 해줄지 말지를 결정함을 통해 피-인정자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인간이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칭찬과 인정이란 행위에도 기브앤 테이크는 당연히 존재하겠지. 하지만 인정을 주고받는 행위가 상호적이지 않을 때, 그리고 피-인정자가 그 인정을 미친듯이 갈구할 때, 관계는 수직적으로 재편된다. 내게는 인간 세계에서 맺은 태초의 관계인 엄마와의 그것이 그랬다.


인정과 사랑은 동의어가 아니어야 하는데, 애정 표현이 서툰 엄마와 애정이 필요했던 나의 콜라보랄까. 그러니 결국 시험을 잘 봐서 엄마에게 인정받는 것이 그토록 중요했을 것이고, 내 내면 어딘가에는 이 나이 먹고도 고작 수학 시험 따위를 망쳐서 내 실력이 탄로나는 순간이 죽기보다 두려운 어린아이가 남아있는 것이겠지.


결국은 또 양가감정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들켜 유약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치아를 '깍 깨물고' 싶을 만큼 싫으면서도 또 가끔은 물러터진 내 내면을 드러내고 싶기도 하다. 인정받고 싶어해도 괜찮아, 그런다고 네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야, 라는 말을 듣고 싶기도 하고 의지도 하고 싶고. 하지만 의지하는 순간 내 에고는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이것이 나의 보가트(1)이다.


한 친구가 예전에 내 시쓰는 방식에 대해 기가 막힌 비유를 했었는데, 학창 시절 짝꿍이 시험지를 훔쳐보지 못하도록 팔로 시험지를 가린 채 쓴 것 같다고 했다. 너무 맞는 말이라 웃음이 나왔다. 언제까지고 컨닝 따위를 두려워하는 고지식한 K-범생이로 살 수는 없지.


그러니 올해 하반기의 목표는 내 유약함을 마음껏 들킬 수 있고 들켜도 되는, 아니 들키고 싶은 사람을 주변에 많이 두는 것. 끝없이 유약함을 보여줘도 다 괜찮다고 말하는,'그래서 네가 싫어'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애인으로 두는 것. 나 자신의 맨얼굴을 최대한 많이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악몽 덜 꾸기.




(1)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의 생물로, 마주한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으로 변신할 수 있다. 론의 보가트는 거대한 거미, 헤르미온느의 보가트는 전과목 시험에서 낙제하는 것, 해리의 보가트는 마법사들의 감옥인 아즈카반의 교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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