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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일 Jun 18. 2021

이터널선샤인 l 아, 이 징그러운 사랑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기꺼이 그렇게 할 거야, 널 만나기 위해

뇌의 뉴런을 이용해 서로를 지워버린 과거의 연인은, 기억을 분명 깨끗이 지워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인지 필연인지 서로 다시 만난다. 

심지어 지우기 이전에 만났을 때와 비슷한 이유로 서로에게 끌린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속 연인인 클레멘타인과 조엘의 이야기이다.


서로에 대한 기억을 ‘없었던 것처럼’ 지워버리는 건 수많은 이별 방법 중에서도 가장 악질스런 방식에 속할 것이다. 끝없는 ‘깨붙’의 굴레를 벗어나 너를 절대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일일 텐데. 


그럼에도 만나게 되어버리는 건 얼마나 지지부진한 인연인가. 얼마나 징글징글한가.   


게다가 더욱 징그러운 상황은 그렇게 ‘백지 상태’로 다시 만나게 된 표면적으로는 서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과거의 본인이 서로에 대해 가장 싫어하는 점에 대해 녹음한 파일을, 심지어 상대 앞에서 듣게 되는 것이다.


왜 누구든 그래 본 경험이 있지 않는가. 이별 후.

 

너무 사랑하지만 그래서 더욱 잊어야 해서, 그 사람과 ‘헤어져야만 했던 이유’를 한바닥 적어놓고 스스로를 설득해 본 일. 상대를 잊기 위해 계속 생각하고 되새겨야 하는 그 사람의 가장 큰 단점들. 


더없이 잔인한 코멘트일 수밖에 없는 그 말들을 ‘표면적으로는 지금 막 만난’ 당사자 앞에서 들려주게 되어 버린 상황인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상황인 거지.

나는 이 사람을 막 만났는데 이상하게 끌린다. 잘 해보고 싶다.

그런데, 그 사람과의 지지고 볶는 미래를 이미 다 겪고 질릴 대로 질려버린 미래의 내가 나에게 찾아와,


“그 사람 만나봤자, 어차피 똑같이 헤어질 거야. 너희는 애초에 잘 안 맞아. 걔는 지루하고, 너를 질리게 만들고, 계속 싸우면서 좋았던 감정들도 다 동나고, 결국 너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걔랑 헤어질 걸?” 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초치는 상황인지.



  원래 사랑에 빠진 남녀는 아무리 주변에서 “걔 만나지 마” 라고 말한들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지만, 이 경우에는 미래의 내가 직접 와서 헤어져야 할 이유를 시작도 전에 구구절절 알려주는 꼴이다.


 나는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이런 상황에서 미래의 나 자신에게 반박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겪어본 미래, 그것도 결과가 좋지 않은 지지부진한 미래를 다시 겪기로 결정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 지금은 당신에 대해 좋아하지 않는 점을 하나도 생각하지 못하겠어요.


- 하지만 앞으로 찾게 될 거에요. 마음에 들지 않는 점들이 생길 거고, 나는 당신에게 질릴 거고, 답답해할 거에요. 왜냐하면 그게 우리가 사귀면 벌어질 일들이니까.   


같은 이유로 혼란스러워하며 반박하는 클레멘타인에게 조엘은 Okay, 라는 아주 간단한 말을 한다.


괜찮다고, 우리는 또 싸우고 같은 이유로 서로에게 질리고 지치고 증오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너에게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인간은 상당 부분 효율을 추구하는 이성적인 동물이다. 적어도 수많은 행동경제학 책이나 심리학 책 속에 묘사되기론 그렇다. 인간의 심리 기제 속에는 가능한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하기 위한 본능이 다채롭게도 내재되어 있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실패가 예정된 미래는 안 겪는게 낫다. 힘들 것이 분명한 연애는 시작조차 하지 않는게 맞다. 하지만 그렇게 이성적이기만한 걸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굳이 사랑에까지 지저분한 경제학이 거론되어야만 할까.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건 현실에서 보기 힘든 로맨스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미쳐 돌아가게 만드는, 말도 안 되는, 어이없는, 지지부진한 감정들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고려한 뒤 가장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하고, ‘이성적인 나 자신’에게 취해본 적도 많지만 이상하게도 가끔은 설명이 불가능한 선택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지점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게 아닐까.


내게는 사랑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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