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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일 Jun 18. 2021

사람은 꽃이 아니지만

내 인생의 화양연화


아영.


울림소리인 이응이 세 개나 들어가 부르기도 듣기도 좋은 이름이지만 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줄곧 내 이름을 싫어한다고 말해 왔는데, 그건 한자어 뜻이 ‘예쁜 꽃’이기 때문이다.


남동생의 이름은 ‘빛나는 재상’인 반면 내 이름은 단지 피었다질 뿐인 꽃, 그것도 ‘예쁜’ 꽃 이라는 점이 싫었다.


 무엇에든 의미를 부여하는 성격인 나에게, 여성을 대상화하는 데 흔히 사용되는 객체를 사용해 내 이름을 지은 것이 성에 차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예쁘다’는 형용사는 진부하며 가변적이고 특별함이 없다. 필 때는 예쁘지만 져 버리면 한 철이라는 의미고, 그건 표면에 머문다는 뜻이며, 한 꺼풀로 존재하기에 딱히 달리 해석될 여지가 없다는 거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과연 꽃에 다른 어떤 형용사를 붙여야 할까 싶기도 하다. 영특한 꽃? 용감한 꽃? 자유로운 꽃? 제멋대로인 꽃? 물론 나는 이 모든 형용사들이 ‘예쁜’ 꽃 보다는 훨씬 마음에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에는 죄가 없다. 내 이름이 꽃인 것이 싫을 뿐이지 나는 꽃을 미워하지 않는다. 되려 사진을 찍기 시작한 후 처음 맞은 이번 봄에는 서로 미세한 정도로만 다른 꽃들이 피는 적재적소를 유난스럽게 찾아다니기까지 했다.


창경궁에는 홍매화, 용답역엔 매화를. 용산 가족공원에서는 벚꽃을 봤고 이주 뒤 보라매공원에서는 겹벚꽃을 담았다.


꽃 찍으러 부지런히도 다녔지,


 같은 부류인 그 꽃들은 분명 정말 비슷하게 생겼지만 자세히 보면 다 달랐고, 분명 작년 봄에도 벚꽃을 보며 온 마음으로 예뻐한 기억이 나는데 올해 본 벚꽃은 또 새롭게 예뻤다.


 분명 예쁘다는 형용사가 진부하다고 믿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예쁘다는 말 말고는, 늦봄 바람에 눈꽃처럼 휘날리는 풍성한 겹벚꽃 잎새들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벚꽃이 지면 또 서울숲에 조성된 튤립 밭을 찾아 가야 하고, 그 후엔 안성 팜랜드의 유채꽃이 제철이다. 5월 말까지는 장미철. 여름이 오면 반드시 포항이나 제주도에서 수국을 담아야 하고, 그 뒤에는 해바라기, 좀 더 가을이 가까워지면 코스 모스와 황화코스모스 차례다.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일 년의 스케줄이 빼곡하게 미리 정해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치 육아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의 일과가 인공위성처럼 아이를 축에 두고 공전하는 것처럼, 사진사의 일 년은 꽃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몇 년 째 출사를 다니는 취미 사진가들을 지켜보면 그런 부분이 신기했다. 작년에도 분명 똑같이 피어난 꽃을, 같은 명소에서 봤을 텐데, 어떻게 매년 이 스케줄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인지.


반복은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던데, 매년 꽃을 찾아가 예쁘게 담아내 온 그들은 종내에는 꽃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건 아닌지. 그렇다면, 진부하게 반복되는 것 속에서도 매번 새로운 예쁨을 발견해 내는 게 바로 사랑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마침 나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 꽤 오랜 시간 지난하게 고민 중이었는데.




처음에는 내 인생의 화양연화 시절은 가장 자연스럽고 나답게 살았던, 미국에서 자연인으로 보낸 2012년이라고 생각했 다. 사람은 꽃이 아니며 특히 나는 꽃 같은 사람이고 싶지 않기에 그 당시가 특별히 ‘개화했던’ 시절이라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인생 호시절을 생각하면 많은 이들이 교환학생 시절을 떠올릴 것이다. 특히 그 장소가 날씨 좋고 풍요롭기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엘에이라면 더욱이.


 그리하여 그 시절의 나를 묘사하는 글을 한 바닥 썼는데 쓰자 마자 지워버렸다. 직장인 7년차가 9년 전 대학교 3학년 때의 외국 생활을 그리워하며 그 시절이 호시절이었다고 회상하는 건 세상에, 너무 진부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결과 하게 된 얘기는 어쩌면 더 진부한 꽃 이야기. 그래도 더 마음에 든다. 사람은 꽃이 아니지만, 결국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계절마다 같은 꽃을 피워내고 또 정성으로 지게 만들며 다음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줄곧 나는 꽤 변덕스럽고 관심사가 다양하며 반복적이고 루틴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 루틴함이 주는 안정감이 좋아졌다.


매년 같은 꽃이 피는 곳에 찾아가 같은 꽃을 담아내고, 그 당연하고 지난한 풍경에서 새로운 예쁨을 발견하는 것. 반복적이고 지긋지긋하지만 예쁘다는 말 말고는 표현이 안 되는 것.




삶이란 징글징글한 게 맞다.


사랑스러워 죽겠던 사람도, 처음 입주했을 때 설렜던 쉐어하우스의 내 방도, 미친 듯이 천착 하고 빠져 있던 취미도 특정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 징글징글하고 지겹고 진부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그 징글 징글함을 감내할 수 있는 건 문득 다시 쳐다봤을 때 그 진부함 속에서 새로운 예쁨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에.


같은 꽃이 피는 것을 매년 보기 위해 찾아가는 것이 인생이며 그것이 화양연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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