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의 영역에서 '좋아해'의 영역으로
'왜'는 '좋아해'로 향하는 길목
너는 그 일을 왜 하니, 라고 물었을 때. 그 이유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고등학교 동창의 싸이월드 일기장에서 보고, 지금까지도 문장 전체를 온전히 기억하고 있는 말이다. 이것이 나의 이후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15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날 정도면 어느 정도 임팩트가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극단적 ENTP 타입인 나는 닉행일치의 성향을 보이는 만큼 엄청난 ‘왜’ 성애자이다. 무엇을 하게 되면 ‘왜’ 하게 되었는지, 나를 움직인 내적 동기는 무엇인지 제일 먼저 고민한다. ‘왜’는 목적과도 이어지는 것이어서, 나를 움직이게 만든 가장 핵심적인 동기를 알아야 이 행위의 목표까지도 명확하게 꿰뚫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지향적인 성향이라 뭔가를 시작하면 그것의 결과까지 명료하게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왜 하게 되었는지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을 나도 모르게 시작해 버렸다면, (주로 ‘정서’가 개입하는 영역의 일들이 이러하다) 무조건 이유를 찾고 납득이 될 때까지 고민한다. 필요하면 보고서까지 쓴다. 불렛포인트를 나누어, 내가 왜 이 일을 하게 되었으며 이것을 통해 어떤 숨겨진 내적 동기를 충족하고자 하는 건지 고민한다.
가끔은 동기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고 무의식 이면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경우도 있어, 꿈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모든 이론에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꿈의 해석’에 등장하는 ‘꿈은 현실 소망의 실현을 위한 도구’라는 문장에는 깊이 공감하기 때문에. 현실 세계의 내가 차마 인정하지 못하는 때로는 적나라하고 때로는 부끄러운 동기를 꿈 속의 나는 이상하게 뒤엉킨 서사를 통해 자기주장을 펼치곤 한다. 그런 숨은 동기조차도 나는 알아내고 싶다. ‘왜’를 알고 스스로 납득이 되어야 이 일의, 이 서사의 결말이 보일 테니까.
이런 ‘왜’에 대한 집착은 나 자신 뿐 아니라 유의미한 타인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이어서, 내가 관심 가는 유의미한 타인이 하는 행동의 원인들 또한 늘 궁금해한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개인톡 또는 단체톡방은 항상 “왜?”와 물음표로 끝나는 각종 부연 질문들로 점철되어 있다. 통상적으로 이런 물음표살인마적인 행위는 공격적으로 여겨지기 쉬우나, 나에게는 진정 관심의 표현이다. 오죽하면 엔팁의 플러팅은 질문 폭격이라는 말이 있을까.
모든 질문은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지고, 궁금증은 새로운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그 행동을 추동하는 가장 근원적인 동기는 모두 다르고, 그렇기에 그것을 파내는 일이 내 지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나를 지적으로 궁금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반드시 좋아하게 된다. ‘왜’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의 가장 근원을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이 납득이 되고 내 논리의 흐름의 일부가 된다면 비로소 그 사람은 내 삶 속으로, 내 우주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나에게 결국 ‘왜’는 ‘좋아해’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것.
진짜 좋아하는 건 이유를 댈 수 없는 거야, 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나만의 뾰족한 이유를 만들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못 보는, 함께한 세월이 누적되어야만 알 수 있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왜’로 이어지는 질문들을 통해 파냈기에 알 수 있는. 그 사람만의 특별한 점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일이 사랑이라고 믿기 때문에. 사람 뿐 아니라 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나만의 이유를 찾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어떻게 해서든지 뾰족하고 가장 적확한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서. 나는 이 일을 왜 하고, 그 사람이 왜 좋으며, 이 노래를 왜 십년이 넘도록 좋아하는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왜’를 찾아내서 가장 근사한 것으로 만들어주고 싶다. 이것이 ‘왜’에 집착하는 나의 동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