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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작가 Nov 12. 2021

영감을 준 나의 예술가들

#3



빈센트 반 고흐 (1853-1890)


 그림에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애착을 갖게 된 결정적인 시기는 한 지인과 갤러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이다. 지인 덕분에 그림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 건 확실하다. 2016년 [서울역 반 고흐 인사이드] 분위기는 몽환적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반 고흐의 작품 설명을 전하는 내레이션은 현장의 생동감을 더 했고, 3D 입체영상으로 재현된 반 고흐 작품을 더욱 집중시켰다. 그의 일생을 담은 3D 화폭 속에 관람자도 함께 머무는 듯한 황홀감을 체험하는 것이 이번 전시회의 목적과 취지 생각이 들었다. 문득 많은 사람들이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과 일생을 연구하고 주목하는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아를르에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 귀가 잘린 자화상


 살아생전 한 점의 작품도 팔지 못해 우울증에 달리던 고흐는 셍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고달픈 생활을 하다 결국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예술인으로서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에 따른 '괴로움'과, 동생 테오로부터 생계 지원금을 지원받아야만 했던 '미안함과 죄책감'이 고흐의 작품을 더욱 승화시켰으며 이것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정신병원 창 밖에서 바라본 밤하늘을 강렬한 컬러로 몽환적이고 신비롭게 그린 <별이 빛나는 밤>은 그의 극적인 외로움과 우울증을 압도적으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인간적 고뇌를 담은 작품을 보며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었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정말 너무 어렵다.
그래도 나는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

-빈센트 반 고흐-


 고흐의 아내는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를 취합하여 책으로 출판하였고 그리하여 고흐의 이름이 알려졌다고 한다. 이도 저도 할 수 없었지만 그림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고흐의 결심은 나를 괴롭히는 내면의 두려운 존재를 이겨낼 힘을 주었다. 그 책을 꼭 읽어봐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사소한 작업이라도 매일 반복하는 것만이 완벽한 그림을 그리는 길이지. 긴 호흡으로 천천히 작업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야. 무조건 좋은 그림을 만들겠다는 야심은 바람직하지 않아. 매일 아침 캔버스와 사투를 벌이면서 이기는 만큼 많이 져봐야 해. 그 방법뿐이야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며칠 전에 선물로 받은 2022년 빈센트 반 고흐의 달력 첫 페이지 1월 표지에 <별이 빛나는 밤>이 있어서 뜻깊게 생각한다.


2020 빈센트 반 고흐 달력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해외여행 중에 외국 서점에 방문할 때면 유독 발길을 멈추었던 코너가 다. 바로 화가들의 작품 서적을 보기 위해서다. 화가들탄생부터 살아온 히스토리, 그들의 작품과 세계관을 알 수 있는 서적을 넘겨보는 시간은 갤러리에 방문하여 느끼는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한다. 


The Kiss 키스



 고흐 다음으로 첫눈에 나를 매혹시켰던 작품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품 <키스>였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후덕한 외모의 '구스타프 클림트'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의 자극적인 에로티시즘을 강조하는 작품을 추구했으며, 부의 상징인 금을 사용하여 눈에 띄는 독창적인 작품을 고집했다. 꿈을 꾸는 듯 반쯤 눈을 감은 황홀한 표정의 사람들의 얼굴은 사실주의 기법을, 평면적 배경과 바디는 자포니즘의 영향을 받은 기법으로 동서양의 신비로운 조화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구스타프 클림트 작품의 특징이다. 사람들의 눈을 멀게 했던 그의 마법 같은 표현법은 역사상 손꼽힐 정도이다. 



Judith 유디트 I&II


 나는 결국 연인 <키스>를 대형 사이즈를 구매하였고 아파트 거실에 벽에 모셔 두었다. <키스> 작품을 유심히 바라보며 남성에게 키스받는 여인의 높은 행복지수와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의 갈망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 황홀하고 혹적인 아름다운 작품임이 틀림없다. 매번 볼 때마다 감탄을 한다.






장 프랑수아 밀레 (1814-1875)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밀레의 대해 처음 알게 된 시기는 그림지적 호기심이 많았던  대학생 시절이었다.  여러 화가들의 그림 관심을 보였던 나는 교양선택과목으로 '서양미술' 수업을 선택하여 공부하였다. 몇몇의 개성 강한 화가들 중에서도 유독 '밀레'에 관심을 쏟았던 이유는 밀레의 대표 주요 작품인 <만종> 때문이었다. 교수님의 작품 설명에 눈물을 흘렸던 나를 기억한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에 활동한 풍경화가의 집단 '미르비종파'대표화가였던 밀레는 다른 화가들과 다르게 풍경화보다  농민생활의 모습과 주변 환경을 그렸다. 농민생활을 누구보다 잘 는 이유는 농촌 출신이기 때문이다. 주요 작품 중 《씨 뿌리는 사람》(1850) 《이삭 줍는 사람들》(1857) 《걸음마》(1858) 《만종》(1859) 등은 발표 당시부터 주목을 끌었다.



 <만종>은 나에게 '그림은 예술이고 아름다워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을 확실히 깨우치게 해 준 작품이었다. 교양과목 시간 교수님의 작품 설명을 통해 밀레를 더욱 유심히 관찰해 보았다. 밀레는 19세기 고단하고 소박한 농민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만종>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들녘에 농민들의 주식이었던 감자 수확을 하다가 한 남자와 여자가 삼종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삼종기도란 종을 세 번 친다는 데서 유래한 말로써 그리스도의 강생과 성모 마리아를 공경한다는 뜻으로 바치는 기도로서 서서 기도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아마도 크리스천이며 감자 수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도를 올리는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도하는 그들의 얼굴은 상당히 어둡고 슬퍼 보인다. 교수님도 이 점을 강조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 그림 속 농부 부부의 발아래의 놓인 바구니는 수확한 작물을 담는 바구니가 아니라 배고픔과 기아로 죽은 아이의 관이었다는 의혹이 있다고 설명해 주셨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만종>은 농민들의 배고픔과 고단히 일하는 농민의 일상을 고스란히  담아내었다는 점에서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유 휘젖는 사람 / 이삭줍는 여인들






프리다 칼로 (1907- 1954)


 그림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참 좋다.  친구와 갤러리에 다니면서 감상 후 작품에 대해 이야기는 순간순간이 기쁨이다. 2016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프리다 칼로전>에 함께 갔던 기억이 난다. 꽤나 오래전 지만 그때 <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와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두 권을 구매했었는데 이번 글을 쓰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멕시코의 유명한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의 작품의 탄생과정은 세 가지 큰 사건의 배경이 있다. 첫 번 째는 교통사고로 망가진 육체의 고통, 두 번째는 잦은 유산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깊은 우울증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람둥이 남편 리베라와의 결혼 이후 그의 문란한 사생활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이다. 칼로는 자신의 가혹한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초현실주의 화가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인간승리'라고 표현하고 싶다.



 6살에 소아마비를 앓아 이미 다리를 절었던 칼로는 1925년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전차와 충돌하는 큰 사고를 겪는다. 그 사고 인해  빼고 전신 불구가 되어 버렸다. 부서진 철재 난간이 그녀의 옆구리를 뚫고 골반을 관통하여 질로 빠져나왔다고 한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원인이 바로 자궁 파열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의 대부분은 잉태하지 못한 태아와 붉은 탯줄 그리고 망가진 자신의 몸을 적나라게 보여준다. 그녀가 얼마나 아이를 원했는지 알 수 있는 작품들이 많다.



몇 개의 작은 상처 / 부러진 척추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민중 벽화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당시 유부남이었던 리베라는 칼로와 20살의 나이차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 <프리다 칼로 & 디에로 리베라> 갤러리 북 뒷장에 그들의 옛 흑백사진을 보며 칼로는 도대체 리베라의 어느 점을 그렇게 사랑했는지 의문스러웠다. 예술가 칼로의 눈에는 리베라의 천재적 예술적 재능이 매력적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여전히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녀에게 분명 남자 보는 안목없음은 분명한 것 같다.(웃음).  



칼로와 리베라



 프리다 칼로는 통사고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남편의 문란한 사생활, 외도로 인한 심리적 우울증에 따른 정신적 고통을 오로지 그림을 그리며 극복해 냈다. 칼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스러운 운명 앞에 좌절하지 않았고 더욱 강해졌다. 리베라가 칼로의 여동생 크리스타나와의 불륜을 저질렀을 때마저도 칼로는 죽음보다 가혹한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그녀의 작품이 단순히 캠퍼스 위의 그림이 아닌 '고통의 결정체'라 본다. 나는 리베라의 외도에도 그를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는 칼로를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리베라를 향한 애절한 사랑은 그녀의 그림 활동에 영향을 주는 원동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프리다 칼로 영화 한 장면


 육체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한 그녀의 고뇌강인한 예술적 의지에 존경을 표한다. 칼로는 비록 출산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 시대를 대변한 혁명가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마지막 죽음에 이를 때까지 사랑하는 리베라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결코 여성으로 실패한 삶은 아니라고, 당신은 예술가로서 인정받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곱씹으며 그녀를 위안해 본다. '고통의 결정체'인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읽기 좋은 글만 쓰려는 나에게 깊은 내면을 관찰하는 식견을 주었고, 성숙한 작가로 성장시키는 최고의 스승이었다.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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