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인 Oct 20. 2020

몽글몽글한 마음과 귀걸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친구는 말했다. 오랜만에 카페에서 만나 수다를 떠는 와중이었다. 그녀의 고백이 갑작스럽기도 했지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말 자체가 생소하게 느껴져 나는 좀 놀랐다.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결혼을 했거나 연애를 오래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썸을 탄다'던가 '누군가를 만난다',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라는 표현으로 그들의 관계를 알리곤 했다. 그런데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말은 어째선지 잘 듣지 못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하지 못한 마음을 친구들에게 먼저 알릴 때의 수줍은 표정은 더욱 생소한 것이었다. 이런 생소함을 느끼는 건 내가 그간 그 마음을 잊고 지내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몽글몽글'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몽글몽글한 마음을 억누르려 애쓰는 중이었다. 자신은 상대방을 좋아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은 알 수 없다는 이유가 컸다. 지난 주말까지 적극적이었던 상대방의 애정공세가 이번 주에는 기세가 꺾여 의아하기도 했다. 하필 서로 일정이 겹쳐 만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밀당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대치 상황에서 그녀는 먼저 다가가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더 어렸다면 먼저 다가갔을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과거의 그녀라면 분명 그러리라 믿으면서 현재의 그녀가 마음을 열지 못하는 이유를 들었다. 오래 만날 거란 확신이 안 든다. 이제는 장기적인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잠깐 만났다 아니면 헤어지는 일 같은 건 나는 못하겠다는 그녀에게 네가 조급해할 이유가 없다는 둥 실없는 조언을 했다. '해봐도 안 해봐도 후회할 거면 해보고 후회해' 따위의 말도 했다.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어느새 우리는 좋아한다는 말을 건네는 건 둘째치고 누군가를 마냥 좋아하는 것도 어려워하는 사람이 돼 버렸나 싶었다. 너는 좀 달랐으면 한다곤 말하지 않았다.


  사랑하고 사랑받은 기억이 희미해져 옛 연인과 찍은 사진을 꺼내보는 날이 있다. 사랑의 물증을 찾는 날은 도무지 자신을 사랑할 수 없거나 앞으로도 혼자일 거란 예감이 드는 날은 아니고 오히려 무탈하게 지내는 나날 중의 하루다. 유별난 해프닝 하나 없이 업무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만들어 먹는 그런 날, 헤어진 연인보다 그녀를 보며 웃고 울던 마음이 그리워지는 건 지금의 평안이 문득 낯설게 느껴져서다.

  사랑이 주는 환희와 상처에서 벗어났을 때 삶은 덜 힘들진 않아도 한결 단순해졌다. 나의 안위만 생각하고 욕망을 충족시키면 됐다. 점점 무거워지는 외로움도 익숙해지면 버틸만했다. 해야 할 일들은 어떻게든 매듭지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사람을 대하는 요령도 알아갔다. 마음을 숨기는 요령이다. 상처 주면 적이 생기고 상처 받으면 자기 손해니 기쁘고 화나고 슬퍼도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할 필요 없다. 요령은 삶을 편하게 한다.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 시간에 원하는 걸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삶도 좋다. 다만 이런 삶이 내게 어느 날 낯설어지는 건 진정으로 원해서 얻어낸 삶이 아니기 때문이지 싶다. 어떤 투쟁을 피해 내몰린 자리에 있던 삶을 우연히 주워 살고 있음을 나는 사실 알고 있다. 삶의 자연스러운 투쟁에서 더 이상 타인에게 상처 입고 싶지 않아 약한 마음을 숨기는 나다. 사랑의 물증은 애달아하다 벅차 하고 상처 입어 아파했던 마음의 증거이기에 그 마음의 부재를 실감하게 한다. 나는 요새 편하게 살지만 점점 더 감정을 잃어간다. 기대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는 삶에 만족해한다. 잃지 않고 얻으려는 요령만 배우면서 비겁해진다. 특히 사랑에 있어 그렇다. 사랑이야 말로 서로를 위해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가장 지고하고 잔인한 투쟁인데도 그렇다. 나는 사랑할 때 가장 아팠다.


  친구와 헤어지기 전 액세서리 숍에 들렀다. 셀 수 없이 많은 귀걸이가 벽면을 모두 메우고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불편해진 나는 친구가 귀걸이를 고르는 동안 주변에서 쭈뼛거리고만 있었다. 그러다 한 귀걸이가 눈에 띄었다. 언젠가 내가 선물로 골랐던 귀걸이와 비슷한 모양의 귀걸이었다. 밑으로 길게 늘어진 금속 줄에 하얗게 빛나는 정육면체가 매달려 있던 귀걸이. 그 귀걸이를 고르기 위해 난생처음 액세서리 브랜드를 검색하고 숍을 돌아다녔던 일이나 숍 직원의 귀에 귀걸이를 대봤던 일, 그녀가 작은 상자에서 꺼낸 귀걸이를 두 귀에 걸어보고 나를 돌아보던 순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어떤 기억들은 잊히지 않고 자꾸만 밀려올까. 귀걸이가 불러낸 기억 속의 마음이 몽글몽글한 것이었을까. 많이 희미해졌지만 뜨겁고 간지러우면서 약간의 통증 같은 것이 느껴지던 마음을 떠올리자 잠깐 나는 딱히 줄 사람도 없고 내 귀에 걸지도 못할 귀걸이를 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또 바로 그 순간 세상에서 내게 가장 필요 없는 것이 귀걸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땐 그랬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의 꿈은 무엇이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