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4시엔 우울해지곤 한다. 여전히 주말이지만, 주말의 여유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집에서 커피를 마시다가도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 거리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랄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들이 그 시간 그곳에 있다. 그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게 사람 마음이다. 생산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주말이면 더 쉽게 우울해진다.
사실 나는 주말을 알차게 보내려고 많은 다짐을 하는 사람이다. 이번 주말에는 화장실 청소를 하고 넷플릭스의 신작 영화를 봐야지 정도만 다짐하면 좋을 텐데, 주말에 글 한 편을 완성하고 봉사활동을 가고 부업거리를 찾아볼 생각까지 하니 고뇌가 뒤따른다. 그렇게 해서 정말로 만족스러운 글 한편을 완성하거나 사람들을 만나 자기 성장을 이루는 주말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 날은 즐겁고 뿌듯하지만 몸이 기진맥진해진다. 휴식이 필요할 때면 그래서 하루 종일 늘어져 있는 주말을 보낸다. 그런 날엔 거실에 누워 온종일 티브이를 보거나 게임을 하다 시계를 보곤 동생에게 묻는다.
"뭘 했다고 벌써 4시지?"
그러면 새벽까지 유튜브를 보던 동생이 침대에서 돌아보며 말한다.
"난 이제 일어났는데."
가끔은 동생의 게으름이 위안이 된다.
주말이면 종종 느끼는 우울감은 내가 오래 전서부터 품어온 강박이 원인이지 싶다. 고등학생 때부터 나는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대학 시절엔 자기 계발도 중요하다고 느껴 공부를 하면서 동아리방을 운영하고 글쓰기를 배우면서 아르바이트로 돈도 벌었다. 새벽에 생화를 포장하는 일을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 오전 강의를 듣던 일이나, 택배 상자를 나르다 버려진 라벨지를 주워 지친 마음에 떠오른 문장을 적어놓던 일들이 기억난다. 반면 휴식의 기억은 거의 없다. 열심히 살아보려는 마음은 어느샌가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되어 나를 압박했다. 자면서도 앓았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그때의 난 그랬다. 매일 밤 피로에 절은 몸으로 침대에 누워 자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떼돈을 벌거나 이름을 알리고 대단한 글을 쓰게 된 건 아니라는 게 지금은 웃기다. 그 시절을 거치면서 이제 좀 쉬엄쉬엄하라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면 어린 내가 애틋해진다. 지금도 남아 있는 강박의 흔적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주말의 늦은 오후에 나를 다소 우울하게 하지만, 예전의 우울을 생각하면 소소한 마음의 변덕으로 받아들일 수준이다. 나도 성장하고 있나 보다.
주말의 우울을 느낄 때면 어느 일요일 밤에 동생과 나눈 대화를 떠올려본다. 마음 편히 쉬는 대신 글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던 날이었다. 나는 문득 이렇게 일이며 배우기며 글쓰기 따위의 것에 힘을 쏟는 이유가 궁극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인데, 전혀 행복하지 않은 지금의 상황이 이상해 동생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동생은 거실에 누운 채 유튜브를 보며 무심하게 답했다.
"행복은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던데."
나는 속으로 그런 말은 어디서 주워듣는 건지 궁금해하면서 그녀에게 한 수 배웠음을 인정했다. 행복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라 생각하자마자 행복하지 않은 지금이 그런대로 괜찮아졌다. 가장 중요한 건 살아가는 일이고, 삶의 수단은 행복 말고도 여러 가지 있으니까. 또 행복이 삶의 수단이라면, 일이며 배우기며 글쓰기 따위의 것에 힘을 쏟는 이유도 행복이 아닌 삶을 이어가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자 지난날의 모든 노고가 필요한 일이었다고 느껴졌다. 산다는 건 얼마나 아득하고 또 욕심나는 일인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하루하루가 지겨워지다 끝내 무서워진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할 때다. 얼굴을 씻고 땅을 파고 거짓말을 하고 개를 산책시키고 밤거리를 걷고 글을 써야 한다. 그게 우리를 살게 한다. 사랑하고 분노하고 우울해하는 일도 잊어선 안된다. 감정 없는 삶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