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방송 중

김여사 방송국 개국일

by 일훈이






나와 언니는 종종 '말을 재밌게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상황을 연기하듯 전달하기 때문이란다.

때론 과하다 싶을 만큼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주인공의 말투와 표정, 제스처를 따라 하는 것은 물론 맛깔난 마무리도 잊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친한 사람들에게만, 언니는 새로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거리낌 없다는 거다. 단둘이 대화를 나눌 땐 더 가관이다. 어디서 아껴놓은 드립들을 한 줄 요약에 담아내는가 하면 그럴듯한 비유를 섞어 상대방의 이야기를 내 것으로 끌어오는 재주도 지녔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을까 싶다. 그래서일까. 둘이서도 잘 놀고 둘 다 솔로다.







우리 화법의 출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엄마다. 어린 시절, 강원도 작은 마을을 주름잡았던 엄마는 소문난 말괄량이 었다고 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노란 교복과 운동화를 가졌던 소녀는 이 집 저 집 들어가 유치원에서 배운 내용을 읊고 다니는가 하면, 지난밤 옆집에서 있었던 일까지 떠들고 다녔단다. 그리고 할 말이 끝나면 쿨하게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동네 할머니들은 엄마를 '지방 방송국'이라 불렀고, 엄마의 방송은 티비가 귀한 마을의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온 마을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엄마의 꿈은 아나운서였지만, 이런저런 인생사가 더해지며 꿈은 꿈으로만 남게 되었다.








20대 때 어촌을 떠난 엄마는 서울에서 아빠를 만났고 지금은 강원도와 정반대 지역, 전남에 계신다. 아빠를 따라 연고도 없는 동네에서 산 지 어언 20년. 귀농 후 비닐하우스를 운영하며 하루를 보내신다. 하우스는 아빠와 엄마가 작물을 키우면 동네 할머니들이 수확하시는 시스템인데, 보통 7~8분 정도가 함께하신다. 이 하우스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 라디오.

20년의 세월이 흐르며 하우스의 규모, 일하시는 분, 아빠 엄마의 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고된 밭일을 갖가지 사연과 노래로 채워주는 라디오는 여전히 훌륭한 노동요다. 간혹 문제가 생겨 라디오를 틀지 못하면 하우스 구성원 모두가 방송이 나올 때까지 아빠를 타박한다 하니, 그 인기가 참 대단하다.










그런데 지난 추석 방문한 하우스에서 라디오보다 더 인기 있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점심 식사 후 시작되는 엄마의 수다 시간. 먹는 양이 적고 속도가 빠른 엄마는 나보다 훨씬 빨리 밥을 드시더니 할머니들의 식사 장소로 떠났다. 그리고 한동안 엄마의 목소리만 들렸다. 지난밤 드라마 내용부터 요즘 샐러드를 챙겨 먹고 살이 빠지기 시작한 언니, 그리고 최근 결혼한 작은 딸의 친구 얘기까지 - 언니와 나의 인권이 점점 사라지는 느낌이었지만 20분 남짓한 시간을 누구보다 알차게 쓰는 엄마와, 더 얘기해보라며 엄마를 재촉하는 할머니들이 참 귀여웠다. 그래. 엄마가 즐겁다는 데 내 부끄러움이 대수인가, 싶다.






2,000평 하우스에 울려 퍼지는 라디오 방송보다 애청자가 확실하고 몰입도 높은 엄마의 방송을 보며 뿌듯하기도 하고 조금 슬프기도 했다. 어린 시절 동네를 주름잡았듯 하우스 전체를 평정하고, 어촌 어르신들의 마음을 들었다놨다한 것처럼 하우스 할머니들을 매료시킨 엄마는 지금도 아나운서가 되고 싶을까.







오늘은 김여사 님의 방송이 시작된 지 55년째 되는 날이다. 생생한 연기와 매력적인 톤, 재치 넘치는 단어 선정까지. 그 어느 프로보다 쫄깃하고 감성적인 엄마의 방송이 20년 후에도, 50년 후에도 이어지는 장수 프로그램이 되었으면 좋겠다. 엄마, 생신 축하해요. 작은 딸이 많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