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과 차선 변경
"네가 운전을 한다고? 어떻게?"
드디어 운전대를 잡게 된 내 소식에 친구들은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난 길 잃는 게 취미요, 헤매는 게 특기인, 자타공인 방향치였다. 하지만 크게 걱정은 없었다. 지금은 문명의 세례를 누리고 있는 21세기 아닌가. 내 갈 길은 내비게이션이 알려줄 터. 나는 그저 작은 기계가 보내는 음성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됐다. 그게 꽤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온갖 차들이 잔뜩 나와 있는 복잡한 서울 시내에서 네비의 지시를 따르는 건 특히나 어려운 일이었다. 뿜어내는 매연보다 짙은 농도의 짜증과 분노를 금방이라도 터뜨릴 것만 같은 차들과, 촘촘하게 놓여 있는 신호등 사이에서 이미 정신은 혼미해졌다. 그 어디에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지만, 복잡한 길 위에 미숙한 내 존재 자체가 커다란 민폐인 것만 같아 움츠러들었다. 매끈한 기계 안에 들어간 사람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들의 날카로운 소리가 클랙슨을 타고 내질러지면 움찔했다.
네비가 직진 이외의 다른 방향을 지시할 때 역시 움찔거렸다. ‘약 300m 후 좌회전’이라고 하면 그때부터 정신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300m는 도대체 어디쯤인지, 100m라는 단위는 학창 시절 체육시간 이외에는 써 본 적 없었다. 그러니 미터법으로 설명하는 네비의 세계를 어찌 이해하리. 그러다 보니 네비 속 ‘좌회전’ 지점이 점점 가까워 와도 여전히 갈팡질팡하던 마음은 급기야 폭발해버렸다.
"그래서 이번에 돌라는 거야, 다음 좌회전 신호에 돌라는 거야?!!"
에라 모르겠다 싶어 좌회전 차선으로 변경해 깜빡이를 켜고 나면 상황이 명확해졌다. 길을 잘못 들었다. 상황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는 초보가 현실을 직시한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었다. 그 순간에 차선을 변경하는 건 무리였다. 그저 좌회전을 해서 애먼 동네를 돌 수밖에. 한숨을 푹푹 쉬고 있을 때, 앞 차가 직진 차선으로 몸을 틀었다. 경이감에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도 한번 따라 해 볼까? 할 수 있지도 않을까? 결국 나는 갔다. 왼쪽으로. 시선은 옆 차선으로 옮긴 차를 향했지만 몸은 좌회전을 할 수밖에 없는 기구한 초보의 운명이라니.
네비와 잘 지내고픈 나의 마음은 자꾸만 빗나갔다. 그럴 때마다 내 속도 모르는 네비는 세상 침착한 목소리로 '경로를 이탈하여 재탐색한다'고 말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침착한 그 음성은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서울 근교에 사는 친구 집에 갔다 돌아오던 그날도 네비와 나의 불화는 이어졌다. 이번에도 모든 건 혼자만 점잖은 네비 탓이었다. 퇴근 시간을 피하기 위해 4시 반쯤 서둘러 출발한 나는, 얄미운 네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따라 손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네비가 4차선을 이용하라는 말에 1차선에부터 차선을 건너 건너 4차선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네비가 말했다. 잠시 후 좌회전입니다.
"뭐? 4차선이라며? 어떻게 4차선에서 좌회전을 하냐고?!!!!"
비명을 토해내며 폭발한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신호등 앞에서 왼쪽 끝을 바라보았다. 수직으로 꺾어 가야 할 판이었다. 아득해 보였다.
네비와 나의 불협화음은 둘 사이의 어긋난 시간이 빚어낸 결과였다. 네비는 늘 조금 앞서서 길을 안내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좌회전 후 우회전’을 해야 한다면, 아직 좌회전도 하기 전에 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네비는 ‘곧 왼쪽으로 돌 예정이니 1차선을 이용하다 좌회전 차선으로 들어가서 좌회전을 하고, 금방 우회전을 해야 하니 바로 4차선으로 가라.’고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긴 말을 다 들어줄 정신이 있을리 없었다. 난 초본데!! 내 귀에 들어온 건 마지막 ‘4차선으로 가라’ 뿐. 결국 4차선에서 좌회전 시도를 포기한 나는, 파란 신호에 직진을 했고 늘 그렇듯 네비는 침착하게 경로를 다시 탐색했다. 그가 안내한 길 다시 그 길로 간 뒤 좌회전을 하라는 것이었다. 엄청나게 돌아가야 하는 길이었다. 아오! 짜증이 폭발하는 그 순간,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쭉 직진을 하면 서울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쭉 가기로 했다.
'흥, 네비, 네 말 따윈 듣지 않겠어.'
살짝 올라오는 통쾌한 마음을 실어 액셀을 밟았다. 그 길이 지옥길인 줄 모른 채.
그날 나는 서울 동서횡단을 했다. 그것도 퇴근시간에! 빡빡한 차들, 빵빵대는 소리를 타고 들리는 날카로운 신경 탓에 차선을 바꾸지 못해 직진만 하느라 길을 여러 번 놓쳐버렸다. 네비는 계속해서 경로를 재탐색하느라 바빴고, 나는 그 길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바빴다. 이러다간 집에 도저히 갈 수 없을 것 같을 때, 눈을 꼭 감고 자석 N극과 S극처럼 가까이 붙어 움직이는 차 사이에 차 앞머리를 들이밀었다. '저 집에 가야 해요!'라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은 절규를 외치며. 그때 차와 차 사이의 간격 하나가 조금 벌어졌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쇳덩이가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어서 들어와, 하면서. 재빨리 차를 들이밀고는 비상등을 켰다. ‘고맙습니다!’ 외치며.
갈 때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던 길을 무려 2시간 30분에 걸쳐 돌아왔다. 아주 긴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