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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도 특권

핸들 앞에서 만나는 익숙하고도 낯선 나의 단면들

by 정담아

아주 어렸을 때, 운전 관련 교육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장소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여러 명을 한 곳에 몰아두고 화면에 띄워놓고 보여줬던 것만 확실하다. 그런 곳에서 보여주는 영상 대부분이 그렇듯 스토리와 캐릭터는 모두 분명한 목적을 향해 가고 있었다. 게다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면, 아주 효과적인 교육 영상이 아니었나 싶다.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썸 타는 두 남녀가 차를 타는데, 난폭운전을 하는 썸남을 보고 썸녀가 학을 뗐다는 이야기. 반면, 딱히 호감이 없던 남자가 점잖게 운전하는 걸 보고 호감이 생겼다는 이야기. 어이없고 뻔한 스토리지만 메시지는 확실했다. 그 빛바랜 영상이 떠오른 건 운전석에 앉은 나와 마주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전에도 운전할 때 성격이 드러난다는 둥, 운전대를 잡으면 성격이 급해진다는 둥의 이야기를 듣긴 했다. 하지만 모두 흘려 들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조수석이나 뒷자리에만 앉았던 나는, 정말 승객의 역할에만 충실했을 뿐, 운전자의 운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거칠게 핸들을 꺾든, 가시 돋친 말을 불쑥 뱉든 그저 날 태워주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운전대를 잡게 되면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차’의 운전대를 주기적으로 잡게 되면서 스쳐 지났던 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누군가의 성격을 어찌 하나로 단정할 수 있겠냐만은, 내게서 두드러지는 특성 중 하나는 바로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극도로 못 견딘다’는 것이다. 결코 착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나’를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빠르게, 그러면서 깊이, 타인의 감정에 이입하기 때문에, 자꾸만 내 행동이나 말을 곱씹고 주저하는 소심쟁이가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조심스럽다는 의미는 아니다. 머릿속으로 수십 번 돌려보지만 결국 마음 가는 대로 해버리고 뒤늦게 혼자 이불 킥을 날리는 악순환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으니까. 이런 문제적 성격은 운전할 때도 그대로 드러났다. 정말 그. 대.로.


운전의 목표는 어딘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피해 주지 않기’였다. 좁은 골목길을 접었을 때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비켜줘야 한다는 생각에 허둥댔다. 차선도 따로 없고, 옆 주차공간엔 차가 다 차 있는데 어디로 비켜주지? 후진으로 내려가야 하나? 나의 허둥대는 몸짓은 그대로 차가 표현했다. 어색하고 어설픈 뒤뚱거림으로. 그럴 때면 가끔 조수석에서 시니컬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네가 무슨 배려를 하려고 해. 넌 그냥 가만히 있어.”

현명한 말씀이었다. 배려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아, 나는 왜 가지지도 못한 주제에 배려를 하겠다고 버둥댔을까. 콩 한쪽이라도 나눠먹어야 하는 건 맞지만, 내겐 콩 한쪽도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콩을 주겠다고 허우적대고 있었다.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강박 때문인지 운전을 하기 전에는 항상 초긴장 상태였다.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티맵으로 경로를 확인했다. 그리고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런 날엔 꿈에서도 난 운전을 했다. 문제는 쉼 없이 걱정의 회로를 돌리는 무의식과 달리, 의식은 게으르게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티맵으로 경로를 확인했지만, 실은 꼼꼼하게 보지는 않는 편이었다. 기본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도로를 본다한들 내가 갈 길이 보일 리가 없었다. 야심찬 다짐으로 지도를 더듬거리다 결국엔 아, 가보면 알겠지.로 귀결되었다. 지도가 사라진 핸드폰을 저 멀리 팽개치면서 생각했다. 아, 정말 너무 나다.


무의식이 온 신경을 기울여 스트레스를 받지만 정작 그리 꼼꼼하게 준비하진 않는다는 점이 너무 나다웠다. 그리고 막상 운전대를 잡으면, 운전하기 전보다 긴장감이 덜했다. 하면 하는 거지 뭐. 이런 느낌이랄까. 그럴 때면 또 생각했다. 아, 너무 나다. 허술한 긴장감에 싸인 스스로에게 익숙한 어이없음을 느끼며 피식 웃다가 어딘가에서 빵- 빵빵- 하는 소리가 들리면 화들짝 놀라며 홀로 속사포같이 소리쳤다.

어? 왜왜? 무슨 일이야? 나 뭐 잘못했니? 나 아닌데. 왜? 왜? 왜 그러는 건데? 나 뭘 잘못한 건데?!

누군가의 클랙슨 소리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나는 클랙슨을 누르지 못했다.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던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건, 친구의 질문 때문이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내 차를 인지하지 못하고 느리게 걸어가시는 할머니를 보면서 할머니와 비슷한 걸음으로 느리게 따라가고 있을 때였다.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물었다.


왜 빵- 안 울려?

글쎄. 눌러본 적이 없는데.

왜?

글쎄. 누르는 법을 잘 모르나 봐. 눌러봤는데 소리가 안 나.

세게 눌러.

그러다 큰 소리가 나면 어떡해?


소리를 내기 위한 버튼을 누르면서 소리가 크면 어쩌냐니. 짧은 대화는 친구의 어이없는 표정으로 끝났다. 그 이후로도 몇 번 시도해봤지만 클랙슨의 소리를 울리진 못했다. 차마 손에 힘을 더 주지 못하고 멈췄다. 큰 소리에 잘 놀라는 편인 나는, 급작스러운 큰 소리가 좀 불편했다. 내 잘못일 수 있는데, 내가 소리 지르는 건 아닐까, 하는 자기 검열도 작동했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기 전에 내가 잘못한 부분은 없는지 되짚어 보는 내가 또 떠올랐다. 어휴, 또 너무 나다.


그래도 위험을 알릴 때는 소리를 질러야 하니까, 조만간 한번 눌러봐야지. 원래 가진 자가 소리 없이 움직이는 법, 없는 자들은 소리를 질러야 하니까. 언젠가는 조용히, 배려를 흩뿌릴 수 있는 날이 오길. 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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