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담아 Jul 13. 2023

제주에서 만나는 책 축제

글로 만나는 인연, 책으로 마주하는 삶

피, 땀, 눈물. 그리고 설렘


서울, 춘천, 수원, 대구, 군산. 여기저기서 북마켓을 참여했지만 제주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큰 설렘을 설명하기엔 단지 '처음'이라는 이유만은 부족했다. 첫 시작이 주는 묘한 불안과 빳빳한 긴장감과는 뭔가 다른 구석이 있었다. 팽팽하게 늘어난 신경줄 사이에 막연한 기대감이 문득문득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억 속 첫 제주가 떠올랐던 탓일지도 모른다. 정확히 십 년 전 이 맘 때쯤 나는 생애 첫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캐리어 속엔 한 달 반 동안 게스트 하우스 스태프로 지내기 위한 짐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제주가 내게 주는 느낌은 이색적인 여행지보다는 친근한 고향 쪽에 가까웠다. 팍팍한 일상에서 지친 내게 쉴 수 있는 곳, 어렵게 낸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많은 관광 일정을 소화낼 필요 없이 그저 늘어져 있어도 되는 곳. 그런 제주였기에,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살랑이는 바람을 품으며 제주행을 향한 하루 하루를 채워갔다.


그러면서도 서울에서 군산까지 계속된 분주함과 경직된 시간의 이유는 바로 이 북페어였다. 지금까지 출판한 독립출판물 총 4권. 분명 주어진 테이블을 꽤 채울 순 있지만 책만으로 승부하기엔 부족했다. 아무런 설명도, 굿즈도 없이 책만 쫙 펼쳐놓는 멋짐을 발취하기엔 나의 유명세나 글의 퀄리티가 아쉬웠달까. 게다가 북페어 참가 횟수가 늘어날수록 매번 같은 작품을 내놓기에 좀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나름 책 '축제' 아닌가. 마켓에 나갈 때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도, 책에 흥미가 없는 사람도 모두 이 시간을 즐길 수 있었으면, '책'과 '글'이 주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제주북페어는 매우 그 규모도 크고 육지와 달리 좀처럼 열리지 않는 행사에 대한 기대가 꽤나 높다고 들었기에, 욕심을 좀 부려보기로 했다.


애초에 그림에 재주가 없기에, 그림과 관련한 굿즈는 포기. 글이나 문장과 관련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 며칠 동안 몇 번의 수정을 거쳐 에세이 한 편씩 담은 '달그랑 한 편'과 한 편의 에세이를 담은 작은 아코디언북 4편이 들어간 '알록달록 포켓북'을 완성했다. AI가 따라올 수 없는 휴먼 터치를 가득 담은 수작업이 만들어낸, 눈물겨운 결과물이었다. 


봄 사랑 벚꽃, 그리고 책 운동회


드디어 북페어 당일. 적당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 그 완벽한 날씨를 가르는 걸음은 조금 싱숭생숭 했다. 바로 부스와 테이블 세팅이 남았기 때문! 사실 그동안 마켓에 참여할 때마다 부스의 배치에는 별로 신경 쓴 적이 없었다. 판매자보다는 글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크기도 했고, 예쁜 세팅을 위해 들여야 하는 품-이를 테면 엄청난 검색과 시행착오에 쓰는 돈과 노력-도 아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글 작가에서 텍스트 관련 작가 혹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스토리텔러 정도로 정체성이 이동 중인지 오래. 다른 사람들만큼의 품을 들이진 않았지만, 최소한의 고민이 시작되었고, 그만큼 긴장도 올라왔다. 주어진 좁은 공간 위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이 많은 것들을 놓을지, 어떻게 하면 수많은 팀들 사이에서 눈길을 한 번이라도 받을지 걱정이었지만, 어찌저찌 우당탕탕 세팅을 마쳤다.


처음엔 손님이 영 오지 않았다. 작년에 비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는데 도대체 어디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족 단위의 수많은 어린이 손님들의 시선을 끌 아이템이 내게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 조금 서글퍼질 때쯤 반가운 발길이 다가왔다. 그 첫번째는 단연 서울에서 온 손님이었다. 생의 첫 글쓰기 워크숍 '일문일담'에서 만난 지인 S. 두 번의 워크숍을 함께 했지만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눈치없이 끈적한 애정이 아닌, 묵묵한 응원을 담은 그의 방문은 꽤나 감동적이고 든든했다. 그는 손님이 몰릴 때 판매를 도와주었고, 테이블 세팅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직선으로 말하지만 뾰족하지 않은 그의 화법과 적당한 온기를 머금은 산뜻한 그의 마음이 참 좋았다. 


뜻밖의 만남은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글 쓰는 걸 좋아한다는 어떤 분은 내 책 하나 하나에 관심을 가져주었고, 꽤 오랜 이야기를 나눈 뒤 굿바이 대신, 서울에서의 '다음'을 기약하며 떠났다. 메일로만 입고 및 정산 이야기와 막연한 안부를 전했던 책방 지기님들을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한 작가님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방문했다는 서점 대표님도 만났다. '제주북페어에서 딱 한 군데를 들러야 한다면 정담아 작가 부스를 들르라'는 말도, '아껴 읽느라 딱 하나만 읽고 남겨두었다'고 슬쩍 건넨 말도 피로에서 나를 번쩍 꺼내올렸다. 나름 야심차게 준비했던 '알록달록 포켓북'과 '달그랑 한 편'과 책에서 만난 문장들을 보고 '꽂혔다'거나 '너무 공감이 된다'는, 그저 스치듯 뱉은 말들을 열심히 주워 담았다. 


축제가 끝나고 난 뒤


당연히 수입보단 지출이 큰 축제였다. 새로운 아이템을 만드느라 제작비 자체가 꽤나 들기도 했고, 이곳까지 오는 교통비며 머무는 동안의 숙박 및 식비까지 생각하면 완벽히 적자인 행사가 분명하다. 하지만 참가비가 무료이기도 했고, 애초에 큰 기대를 안 해서였는지 그다지 실망하진 않았다. 게다가 명목비용에 포함되지 않은 항목들이 있지 않은가. 설렘과 아름다운 풍경, 의외의 만남 같은. 


함께 북마켓에 참여했던 이는 나를 보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에너지가 넘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워~~~~~케이션 일정 탓에 일에 치여 골골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활기가 넘쳐 놀랐다는 것이었다. 그게 워케이션의 묘미 아닐까. 서울과 같은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잠시 그 끈을 느슨하게 놓을 수 있는 여유가 허락되는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좋다. 고개를 들면 각 잡고 서 있는 회색 건물 대신 보이는 푸른 바다의 일렁임이, 숙소를 나서면 언제든 나를 놀려줄 준비가 된 개구진 골목길이, 그냥 잠시 멈춰도 된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 매섭게 불어도 시리지 않은 바람이, 그 안에 스민 따스한 봄볕이, 뾰족한 신경 위에 선 내게 위로를 건넨다. 조금 천천히 가도 좋다고. 여기는 제주라고. 그 속삭임에 기대 며칠 동안 조금은 게으름을 부려볼 참이다. 과연...?

작가의 이전글 일상을 '담아,내다' 2기 모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