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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담아 Jul 15. 2023

봄이 선물한 인연(1)

나주 곰탕 거리에서 만난 애호박찌개

우연히 만난 인연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사람을 좋아한다. 내게 의미없는 그저 혼잡하고 시끄러운 군중을 극도로 피하지만, 내게 의미있는 어떤 존재가 주는 온도, 그가 선물하는 커다랗고 복잡한 세계를 환영한다. 다만, 낯선 누군가가 내게 그런 존재가 되기까지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일단 마음을 한 번 열면 그 속도와 정도가 제어가 되지 않지만 처음 그 문고리를 잡을 때까지 기나긴 주저의 시간이 흐른다. 딸깍- 하는 그 순간까지 걸리는 지리한 시간을 참지 못하고 스쳐지난 인연이 얼마나 많던가. 그래서 일까. 대부분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조용히 혼자 지내다 고이 혼자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이번 워케이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이라는 개인 이동 수단으로 움직였고, 비수기이라 그런지 게스트 하우스 도미토리에도 투숙객이 나 혼자인 경우도 있었다. 간혹 라운지에서 스치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지만 어색한 눈인사만 나눌 뿐이었다. '워'케이션인 만큼 라운지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바삐 손가락을 움직일 때가 많기도 했고,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원하기도 했지만 실은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기대하기도 했다. 2인분 이상만 주문이 가능한 음식을 함께할 이가 필요하기도 하고, 내가 방문한 지역의 지난 시간을 고스란히 지나온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했기에. 하지만 낯선 이 앞에선 늘 투명인간이 되고 싶은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저 어색한 눈빛의 긴 꼬리를 재빨리 잡아 끌어 하던 일에 집중했다. 그런 내가, 놀랍게도 낯선 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무려 커피 한 잔을 나누는 일이 있었다. 그 놀라운 사건은 바로 나주에서 일어났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광주에서 유명하다는 '명화식육식당'을 우연히 발견했다. 애호박찌개가 대표 메뉴인데, 애호박과 돼지고기가 가득 들어간 빨간 국물에 밥이 말아 나온다고 했다. 집에서 자주 먹던 고추장 찌개와 비슷한 것 같아 보였기에 꽤나 관심이 갔다. 좀 더 검색을 해보니 나름 광주 지역에서 유명한 메뉴인 것 같았다. 예상 경로와 주차장 등을 고려해 비슷한 메뉴를 파는 여러 식당을 저장해두었다. 하지만 정작 당일 목적지에 집중하느라 그곳을 지나쳐버린 나는, 내가 서 있는 곳이 나주곰탕거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미 배가 고파졌기에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때, 눈에 들온 게 바로 '수미 식당'. 곰탕 거리에 백반을 파는 이 고고함이라니, 왠지 마음이 끌렸다. 빠르게 인터넷을 검색하니 평점과 리뷰가 모두 훌륭했다. 에라, 모르겠다 도전! 식당 문을 열었다.  


점심 무렵이라 그런지 이미 손님이 꽤 있었다. 혼자 주방과 홀을 모두 관리하던 사장님은 매우 분주해보였다. 용기내어 인기척을 하기 전까지는 나의 등장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겨우 애호박 찌개를 주문한 내 앞에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사장님은 '혼자와서 반찬을 조금 주었다'고 귀띔을 해주셨다. 원래 음식 남기는 걸 극도로 싫어하기에 합리적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른 테이블을 슬쩍 보니 조금 나온 건 반찬 양이 아니라, 반찬 가짓 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뉴가 달라서 나오는 반찬이 다른 건가? 왠지 빈정이 상했지만 너무도 정신없어 보이는 뒤통수를 보고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앞에 있는 반찬들을 성실하게 먹을 뿐.


"좀 더 가져다 줄까?"

밥에 비해 반찬을 많이 먹는 나는, 이미 세 종류의 반찬을 다 비운 상태였지만 분주한 주방을 향해 입을 뻥긋할 타이밍을 찾지 못했을 뿐더러 '혼자 왔음'에도 반찬을 거덜내는 것의 합리성에 대해 고민하던 중이었다. 사장님은 풍요로운 미소를 띄우며 반찬을 한가득 리필해주셨다. 사실 생각보다 너무 많았지만 듬뿍 담긴 게 음식만은 아닌 것 같아 꼭꼭 씹어 넘겼다. 심지어 맛있었다. 묵은 김치는 전라도 지역 특유의 풍성한 젓갈향이 묻어났고, 씹을수록 양념을 먹은 채소가 머금은 시간의 향이 입 안에 퍼졌다. 숟가락으로 퍼서 먹어야 할 만큼 부스러지고 못생긴 묵도 새로운 맛이었다. 단출한 양념에 다른 재료 없이 오직 묵 자체의 맛만 살린 깔끔한 맛. 꼬들하고도 쫀득한 식감의 재미와 간명한 맛의 깊이가 가벼움과 묵직함을 오가며 식사의 즐거움을 더했다. 신나게 식사에 집중하고 있을 때쯤 사장님이 다시 다가오셨다.


"아이고, 내가 안 봤으면 맨 밥 먹을 뻔 했네. 밥 좀 더 줄까?"

아... 어색하게 움직이는 근육에게 정신 차리라 소리치며 웃음을 만들어 보이며 답했다. 괜찮다고. 너무 바빠 보이셔서 그랬다고. 손으로는 손님이 한 바탕 쓸고 나간 테이블을 치우며 사장님은 내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내 앞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처음 시작은 '어쩌다 이곳에 왔는지'였다. 우연히 발견했고, 인터넷에서 이곳이 엄청 친절하고 맛있다고 써 있었다고, 과장 반 스푼을 넣어 말씀드렸더니 사장님은 배시시 웃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러더니 말씀하셨다. 

"커피 한 잔 할래? 설탕은 넣나?"


설탕이라니. 그랬다. 사장님은 자판기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탄 커피를, 종이컵에 고이 담아 쟁반에 받쳐 들고 오셨다. 이런 질문이 실례가 되려나 망설이며 조심히 나이를 물으셨고, '아주 많다'는 내 대답에 헛웃음을 한 번 날리시더니, 본인의 딸 같다며 한 걸음 더 다가와 내 마음의 문고리를 벌컥 열어젖혔다. 나는 앉아 있던 의자를 우리 사이에 놓인 테이블 쪽으로 더 바짝 붙여 앉았다. 나이를 지나 직업, 각자가 지나온 시간들이 테이블 위를 오갔다. 내 손을 끌고 식당 근처의 카페와 산책길 추천까지 마친 사장님에게 나는 중요한 말을 꺼냈다.

"근데... 저 계산 해야하는데요?"

호호호 웃던 사장님의 반응은 나를 놀라게 했다. 카드를 내미는 내게 '너무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 아니, 저희는 사장과 손님으로 만난 관계인 걸요, 라는 말을 삼키고 '당연히 받으셔야죠!'라고 말하는 내게, 사장님은 굳이 인상 전 비용으로 받겠다며 천 원을 에누리해주시더니 입구까지 나와 인사를 건네셨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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