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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세계가 건네는 위로

그라나다의 골목

by 정담아

스페인 남부의 도시, 그라나다의 겨울은 따사로웠다. 아니, 따스하다는 단어만으로는 부족했다. 포근했지만 포근함이 가진 부피감보다는 훨씬 가벼웠다. 그 얇은 무게는 투명함으로 다가왔다. 맑고 투명한 공기가 안내하는 파란 하늘이 우리를 따라다녔다. 언제든 고개만 들면 맑게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살던 도시보다 더 아득하게 느려졌지만 그가 품고 있는 구름도, 그가 품어 내고 있는 빛깔도 더 선명했다. 거리감을 뛰어넘는 친밀감이 밀려들어왔다. 멀지만 그곳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음에, 우리 사이에 그 어떤 불투명한 물질이 가로막지 않음이 좋았다.


투명한 공기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볕이 정수리, 목덜미, 어깨에 내려앉았다. 덕분에 쌀쌀하게 뭉친 공기가 내려앉은 거리에서도 따뜻했다. 기분이 좋았다. 산뜻하게 따스한 온도가 좋았고, 고개를 돌려 던지는 시선마다 깨끗하게 보이는 풍경들이 좋았다. 폐를 크게 부풀려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알함브라 궁전을 비롯해 이국적이고 신비한 정취를 머금고 있는 공기가 온몸으로 들어왔다.


“그라나다는 알함브라 빼면 볼 게 하나도 없어요.”

가우디 투어에서 만난 한국인이 알함브라 궁전 티켓을 예매하지 않았다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그때 서로를 바라보며 ‘어쩌지’에서 ‘어쩔 수 없지’로 결론을 맺고 말았던 우리는, 그라나다에 도착한 순간 그 말이 절반만 맞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도시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건 단연 알함브라였다. 하지만 그 거대한 건축물을 중심으로 도시 전체가 만들어내는 정취는 그 어떤 명소를 압도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관광지였다. 굳이 한 곳을 딱 찍어 찾아가지 않더라도 발길이 닿는 곳마다 아름다웠다.


그 심미적 완성도를 높이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골목이었다. 구불구불하고 작은 골목이 많아 마치 도시 자체가 하나의 미로 같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좁은 골목을 따라 버스가 이동하는 장면이었다. 버스와 바로 몸이 스칠 듯한 거리를 간신히 피해 가며,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을 품고 그 미로 속을 걷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공간을 마주하기도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을 만나면 일단 들어갔다. 대상에 대한 빈약한 정보는 때론 섬세한 눈길로 이어졌다. 하늘로 높게 뻗은 늘씬한 나무들이 만든 정갈한 길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혹시라도 얄팍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구석구석 훑었다. 나의 무지로 지어낼지도 모르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천천히 살폈다. 그곳에 놓인 나무와 돌과 건물, 정원을 정성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그들이 품고 있을 이야기에 대해 상상하고 머물렀을 사람들의 역사에 대해 손을 뻗어보았다. 결국 사실에는 닿지는 못했지만 누군가가 남겨두었을 따스함이 스쳤다.


알 수 없는 공간을 나서면 또 알 수 없는 길이 펼쳐졌다. 굽이굽이 골목 사이를 골라 걸었다. 휑한 대로와 달리 그곳엔 공허가 끼어 들 틈이 없었다. 걷다 보면 금방 나타나는 막다른 벽을 꺾어 다른 길을 찾아야 했고, 골목 구석구석 걸린 삶의 현장 속에서 건져낸 고단함과 재치에 감탄하느라 바빴다. 그 수많은 장면과 감정들이 널린 골목 덕에 도시 전체가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다리를 흐르는 시내는 그 정겨움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어둠이 내린 마을이 결코 무섭지 않게 느껴졌던 건 두툼한 돌덩이들이 만들어낸 투박하지만 아기자기한 골목길 덕이 아니었을까. 달과 등이 주는 은은한 빛 아래서 낮게 들리는 물소리를 깔고 그 위에 핸드폰의 힘을 빌려 잔잔한 기타 선율을 얹었다. 그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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