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생활 패턴 찾기
“스페인에선 낮잠 자는 시간이 따로 있대. 난 스페인 스타일인 거 같아.”
기억에서 희미해진 그 애의 말이 떠오른 건 순전히 시에스타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의 나는 그 애의 말에 코웃음 쳤다. 그냥 깨끗하게 게으름을 인정하라고 했던 것도 같다. 깔깔 비웃던 나와 억울함과 머쓱함을 오가는 표정을 짓던 그 애가 걷던 오래된 장면이 이국땅에서 문득 튀어나왔다. 어정쩡한 시간에 내가 걷고 있던 휑한 거리 위로.
스페인 대부분의 식당이 브레이크 타임을 엄격하게 지키는 건 시에스타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브레이크 타임을 내거는 식당들이 많아지고 있기에 그리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모두가 잠든 것만 같은 거리의 썰렁함은 눈에 익지 않은 풍경이었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고요하게 잠든 거리란 어스름과 어울리는 법이었으니까. 한낮에 쏟아지는 태양빛 속에서 고요하게 문을 닫고 있는 상점들은 영 어색했다. 게다가 그 애매한 시간에 뭘 먹고 싶은 관광객의 입장에선 불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본인은 스페인 스타일인 것 같다고 말했던 그 애와 그 길을 같이 걸었다면, 코웃음 대신 ‘나도!’라고 말할 것 같다. 그때 내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시에스타였으니까.
언제부터였는지 그 시작이 기억나지 않지만 불면증이 따라다녔다. 직장을 다니고부터 5시, 일이 많은 경우는 그 전에 일어나는 게 습관화되면서 수면 패턴이 바뀌었다. 10시 전에 잠들지 않으면 불안해 일찍 잠에 들었다. 문제는 완전한 기상 전까지 불규칙적으로 여러 번 깬다는 것이었다. 눈을 뜨면 12시. 다시 눈을 뜨면 1시 30분. 또다시 눈을 뜨면 3시. 이런 식이다. 결국 자다 깨기 반복에 지쳐 이른 새벽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곤 했다.
체력이 있다면 간단히 요가나 스트레칭을 하고, 피로에 절어 있는 시기라면 그냥 간단히 얼굴에 물을 묻히고 양치질을 한다. 커피를 내리고 간단한 무언가를 입에 넣는다. 눈에도 뭔가를 넣는다. 책이나 넷플릭스 같은. 음악을 켜놓고 글을 끄적이기도 한다. 무언가를 벌이기엔 고요한 새벽 시간이 가장 좋으니까.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여러 감각들을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면 슬슬 피로가 몰려온다. 출근을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아닌 경우엔 나만의 아주 이른 시에스타를 갖는다. 남들이 이상하다 말했지만 언젠가부터 그런 생활이 익숙해져갔다.
흔히 다섯 끼를 먹는다고 하는 스페인의 식사 문화도 내 마음에 꼭 들었다. 이미 이른 낮잠을 자기 전에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자고 일어나서 점심을 먹었다. 이것저것 바삐 혹은 뒹굴뒹굴 느리게 움직이다 간식을 챙겨 먹고 또 저녁을 먹었다. 물론 풍성한 한 끼를 먹기도 하지만 커피와 빵, 크래커와 두유 따위가 소박한 아침과 든든한 간식의 자리를 채운다. 여러 번 나누어 조금씩 쪼개 먹는 것을 선호하는 건 먹을 것을 향한 진심에 한참 모자란 소화력 탓에 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음식을 접하고 싶은 마음과 일하는 틈틈이 작은 선물로 나를 환기시키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문제는 출근을 하게 되면 정해진 식사 시간에, 빠르게, 많이 먹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적게 먹어도 되지만 점심 전까지 쌓인 스트레스와 허기 탓에 스스로가 잘 제어되지 않기에.
직접 싼 도시락을 가지고 다닌 이후 혼자 끊임없이 소소한 간식과 소박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언제나 내가 정하고픈 패턴과 사회가 정해준 패턴 사이에서 일상을 조율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도 내가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찾아볼 생각이다. 시에스타나 다섯 끼의 식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