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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즐기는 법, 스페인의 맛

세비야 타파스 투어

by 정담아

세비야는 그라나다와 달랐다. 도시의 크기, 분위기 등 많은 것이 달랐지만 우리에게 가장 큰 변화는 타파스였다. 그라나다에서는 주로 음료를 주문하면 무료로 제공되는 타파스가 제공되었는데, 세비야에서는 음료와 함께 타파스 메뉴를 주문해야 했다. 그라나다의 천국이 사라짐에 아쉬웠지만 대신 새로운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동안 먹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메뉴에 도전할 수 있는 자유와 모험정신이 선사하는 기쁨이랄까. 그렇게 시작되었다. 세비야에서 펼쳐지는 우리만의 타파스 투어가.


먼저 친구의 가방에 처박혀 있던 스페인 여행 가이드북을 꺼내 음식 편을 펼쳤다. 스페인에 가면 꼭 먹어 봐야 한다는 메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하나씩 세심하고 꼼꼼하게 살피며 아직 섭렵하지 못한 음식들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대부분은 동의의 시선과 도전 의지를 다지며 다음 대상으로 넘어갔지만 가끔은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다.


“이거 먹어본 거 아냐?”

“언제?”

“그라나다에서. 왜 거기 있잖아. 오크통 테이블에서 서서 먹은 데. 마지막 날.”

"그랬나?아니야. 이거랑 달라."

"그런가? 아, 아닌데. 아... 완전 헷갈리네. 맛있었는데."


식당 이름도, 메뉴 이름도 기억할 수 없던 우리의 대화는 대략 이러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진을 확인하는 것! 핸드폰을 꺼내 들고 각자의 앨범을 뒤지며 책 속 사진과 비교해보았다. 그 옆에 쓰인 짧은 설명을 보며 미각을 자극했던 것들의 본질을 알아내기 위해 저 멀리 묻혔던 맛의 기억을 뒤적거렸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이미 스페인에서 꽤 많은 식사를 한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종류의 음식을 섭렵했음을. 하지만 여전히 안 먹어본 음식은 있었다. 우리가 먹어야 할 타파스 메뉴들을 대략적으로 정리했다.


첫 번 째 미션은 살모레호, 걸쭉한 토마토 냉수프였다. 사실 선호하는 맛은 아닐 거라 예상했지만, 미지의 맛일 것 같아 도전 정신이 일었다. 살모레호, 살모레호. 이 정도쯤이야 메뉴판에서 못 찾겠니 내가. 호기롭게 외치며 메뉴판을 펼치는 순간, 뇌는 정지되었다. 잠시 잊었다. 이 알파벳은 영어가 아니었음을. 익숙한 문자들이 만들어내는 낯선 조합 속에서 낑낑대며 겨우 유사해 보이는 것을 찾아냈다. 살구색의 되직한 액체가 접시에 담겨 나왔다. 그 위에는 삶은 달걀 반쪽과 말린 하몽으로 추정되는 조각들이 뿌려져 있었다. 크리미한 질감에서 묻어 나오는 은은한 새콤함이 기억에 남는 맛이었다.


다음에는 대구알 구이를 주문하기로 했다. 미리 주문한 와인을 홀짝이며 연습했다. 우에바스 메를루사 프리타스. 아, 왜 이렇게 긴 거야. 구시렁대며 반복해서 중얼거려보았다. 드디어 실전! 책을 힐끔거리며 연습한 발음을 뱉었다. 우에바스 메를루사 프리타스. 말을 하면서도 의심스러웠다. 이게 전달이 될까. 그 의심이 소리를 더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우에바스...메를.. 아닌가. 나도 쪼그라들었다. 그때, 친구가 옆에서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하! 그는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잠시 후에 음식을 내어주었다.


“구이 아니고 튀김 같은데?”

“물어볼까?”

“음. 그냥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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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도 비슷한 패턴의 대화는 몇 번 더 이어졌다. 단어 한 두 개와 손가락 한 두 개로 알 수 없는 요리들을 주문했고, 다양한 종류의 와인들과 함께 남김없이 비워냈다. 바질소스 따위를 뿌린 절인 엔초비를 얹은 바게트나 하몽이 올라간 빵, 구운 파프리카를 곁들인 참치, 감자튀김 등 우리가 먹었던 음식들은 대부분 익숙한 맛에 익히 먹어왔던 재료들이었지만, 스페인의 맛이 묻어났고 그 사실이 우릴 흥분시켰다.


결국 한국에 비해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는 스페인 타바스 바에서, 한국 외식 비용만큼의 액수가 찍힌 계산서를 받들었다. 옆 자리의 사람이 몇 번을 바뀔 때까지 저린 다리를 꼼지락대며 먹고 마시던 우리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곳은 스페인이었고, 우린 스페인의 맛을 마음껏 즐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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