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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의 또 다른 이유

종잇장에 담긴 맛의 향연, 하몽

by 정담아

하몽을 처음 만난 건 이태원의 한 스페인 식당에서였다. 직장 동료 여럿과 연말 모임 겸 생일 파티를 하는 날이었다. 메뉴판을 보던 중 누군가가 “하몽 어때?”라고 물었고, 쏟아지는 긍정의 물결 속에서 나는 홀로 침묵을 지켰다. 그가 어떠냐고 물었던 ‘하몽’이 무언지 몰랐으니까. 하몽. 혼자 속으로 발음해 보았다. 하몽. 두 음절 속에 숨어들어 간 울림소리들 탓인지 몽글몽글하고 산뜻한 느낌이 났다. 귀엽고 산뜻한 요리 혹은 이색적이고 특별한 비주얼을 상상했다. 조금 들떴다. 언제나 새로운 맛 탐방은 설레니까. 테이블 위의 수많은 접시 사이에서 하몽을 찾았다. 하몽을 처음 만난 그 순간, 홀로 했던 몽글몽글한 상상은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첫인상은 매우 언짢았다. 비싼 가격에 비해 매우 소량으로 제공된다는 점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아주 얇은 게 씹을 필요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궁금했다. 얇게 저민 붉은 살점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하몽을 입에 넣었다. 혀에 닿자마자 가장 먼저 느껴지는 맛은 짭조름이었다. 얄팍한 살을 조심히 씹자 기름기가 묻어났다. 느끼했다. 도무지 비싼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이후로 하몽과 만남은 몇 번 더 있었다. 처음보다는 그다음이, 그보다는 그다음이 매력적인 녀석이었다. 씹을수록 다양한 맛이 느껴졌다. 짠기와 느끼함 사이를 오가며 다양한 레벨을 넘나드는 고소함과 풍미가 매력적이었다. 베이컨처럼 얇지만 하몽만이 가진 담백한 기름기와 촉촉하고 야들야들한 촉감도 좋았다. 비싼 가격에 자주 만날 수 없다는 점도 하몽을 향한 마음을 더 애달프게 했다. 더 알고 싶었다. 하몽의 본고장인 스페인행 티켓을 끊었을 때 다짐했다. 하몽을 한 번 실컷 먹어보자고.


스페인에서 하몽은 편의점이나 마트, 시장, 식당 어느 곳에서든 볼 수 있었다. 때론 아주 얄따란 편육의 모습으로 진공 포장이 되어 있었고, 때론 다리 채로 허공에 걸려 있었다. 한 때는 나와 같은 땅을 밟았을 생명체의 일부가 무심히 매달린 모습이 처음엔 조금 기괴하게 느껴졌다. 물론 오랫동안 축적해온 육식의 습관으로 인해 금방 무덤덤해지긴 했지만. 느끼하면서도 짭짤한 그 맛의 균형감을, 씹을수록 사르르 녹는 지방의 고소함과 은은하게 퍼지는 단맛의 기억 선명해질수록 기괴함이 주는 불편함은 희미해졌다. 맛있을수록 왠지 조금 서글퍼졌다. 하지만 욕망은 감정을 앞질렀다.


본격적인 하몽 투어가 시작되었다. 일단 편의점에서 보이는 저렴한 하몽부터 시작했다. 빵에 올려서 와인과 함께 먹었다. 입에서 살살 녹아 없어지는 부드러움은 없었지만 나름 괜찮은 한 끼였다. 일반 식당과 정육점 운영과 병행하는 하몽 전문 식당에서 샌드위치로도 먹어보았다. 하몽, 치즈, 바게트의 단출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깊은 풍미에 탄성을 내질렀다. 정점은 타파스 바였다. 대롱대롱 매달린 여러 개의 하몽을 보는 것도 신기했지만 지상에 내려와 어떤 장치에 안착한 모습도 신선했다. 무엇보다 주문을 받으면 고정된 커다란 하몽을 얇게 저미는 장인의 섬세한 손길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종잇장 같은 한 조각에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맛의 축제, 그 순간은 정말 짧았다. 마지막 날까지 성실하게 즐겼지만 여전히 고프다. 그 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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