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위로, 스페인 광장
세비야. 스페인을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가장 추천을 많이 했던 곳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 아주 큰 기대를 쌓아 올렸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나간 마음은 금세 터져버리기 십상이듯 첫인상부터 부푼 바람이 터져버렸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상상 속의 아름다움과 여유가 빠진 그저 그런, 중소도시였다. 스페인이 붐이라더니 친구들이 방문하고 난 다음에 빠르게 변화한 건가. 그들이 반했던 때와 계절이 다른 탓인가. 내 기분이 탓인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숙소의 위치 탓이었을까. 그곳이 내게 던져준 첫 번째 이미지는 ‘쇼핑’이었다. 주변엔 상점들이 늘어져 있었고, 세일을 진행하는 시기 때문인지 많은 이들로 북적거렸다. 친구 손에 이끌려 나도 덩달아 ZARA며 MANGO 따위의 매장을 들락거렸다. 창고처럼 커다란 매장에 옷이며, 신발, 가방 같은 물건들이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더미 속에서 저마다의 보물을 찾기에 바빴다.
나 역시 힐끔힐끔 옷을 보았다. 저렴하게 파는 옷은 내게 분명 매력적인 대상이니까. 그럼에도 머뭇거렸다. 내가 지나간 자리마다 쓰레기만 남는 것 같은 껄끄러운 기분 때문에 최소한의 쓰레기만 만들자 했던 다짐 때문이었다. 일회용품 사용 자제도 조금 버거웠지만 새로운 물건을 사지 않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매 순간 경제적 선택을 할 때마다 욕망과 신념이 충돌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몇 번을 들었다 놨다 고민하다 결국 월동준비용 옷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딴 곳에서 두어 벌 더 사고야 말았다. 하아. 공자님께서는 40살이 되면 불혹이라고 하셨거늘 난 아직 어려서 자꾸 주변의 유혹에 흔들리는 걸까. 너무 쉽게 사그라져버린 세비야를 향한 기대감에 나에 대해 짙어진 씁쓸함까지 더해져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위로를 만났다.
스페인 광장. 꼭 가야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저 혼잡한 공간들을 지나 계속 걷다 보니 만났다. 방황하는 발길 끝에 마주한 우연이었지만 필연으로 느껴졌다. 그래, 너를 만나기 위해 내가 이곳에 왔구나! 높게 솟은 탑이며, 반원을 그리며 웅장하게 펼쳐진 건축물도 멋있었지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 건물과 마주하고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건물과 평행을 이루며 흐르는 작은 강 이외에는 딱히 시선을 끄는 게 없었지만 그 여백이야말로 가장 두드러진 아름다움이었다. 얼핏 보면 두 팔을 넓게 펼친 듬직한 건물이 공터를 감싸 안는 것 같지만 또 달리 보면 커다란 대지가 장성한 건축물을 품고 있는 듯했다.
탁 트인 공간에 가만히 앉으니 햇살이 바로 온몸에 내려앉았다. 갇힌 건물 속 의자에 앉아 창을 통해 들어온 성가신 햇빛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적당한 온기가 뻐근한 몸과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달콤한 볕을 보내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어여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떤 그림도 이 색감을 표현해내지 못하고, 어떤 사진도 이 빛을 담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완벽하게 균일하고, 완벽하게 조화로운 풍경이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했다.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광장에 펼쳐진 다양함을 살피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곳의 다채로움은 시각보다 후각으로 먼저 들어왔다. 새, 나무, 풀, 꽃이 보내는 다양한 향기가 걸음마다 들어왔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소리도 번졌다. 처음 보는 새들의 지저귐, 주인과 함께 걷는 개들의 신나는 목소리, 삶의 애환이 녹아든 연주가의 흥겨운 음악과 플라멩코 자락이 자유롭게 흩날렸다. 나무도 제 각각이었다. 꼭대기를 보려면 목이 잔뜩 뒤로 꺾어지는 높이 솟은 야자수, 쨍한 주황빛이 너무도 아름다운 아담한 오렌지 나무, 그보다 더 작은 이름 모를 나무들까지. 한가롭게 흐르는 구름도 자세히 보면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직선과 곡선을, 날카로움과 여유로움을, 번잡함과 나른함을 모두 품은 오후의 그 풍경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고 싶었다. 일상에서도 언제든 꺼내보고 싶은 순간이었다.
먹고, 마시고, 읽고, 걷고, 사고, 떠들고, 자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일상을 저만치 비켜난 듯했지만 또 다른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일련의 상황이 사라졌을 뿐 그저 그런 날들이었다. 다만, 주변이 걷히고 오롯이 나만 남은 그 시간들이 어쩌면 진짜 나를 드러내는 순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세비야에서의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나 같은 나와 함께 보낸, 아주 일상적이고도 특별한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