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해서 미안해, 마드리드
겉모습만 보고 빠르게 판단하는 건 쉽다. 하지만 그만큼 놓치는 게 많기에, 때론 돌아가는 게 더 빠르다. 처음 느낀 인상으로 대충 판단했다가 오히려 큰 오해를 만들 수 있으니까. 실제로 첫인상에 굉장히 별로라고 느꼈던 대상에게 뜻밖의 모습을 발견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럴 때면 오해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의외성에 대한 가산점이 더해진다. 그것이 바로 매력 중 최고인 반전 매력. 마드리드도 그런 반전 매력을 품고 있었다. 매력 발산의 시작은 골목길에 숨어있던 작은 책방이었다.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은 그 공간을 시작으로 굳게 닫혀 있던, 마드리드를 향한 마음이 조금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중심거리가 아닌 후미진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골목마다 조금씩 다른 느낌이었다.
헌책 거리를 찾아갔다. 헌책은 온갖 브랜드 매장과 조명으로 화려하게 둘러싸인 마드리드와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궁금했다. 청계천 느낌일까? 인사동 느낌일까? 아님, 연남이나 망원동같은 분위기일까? 내가 사는 도시의 조각들을 떠올리며 거리를 상상했다. 하지만 오래된 보물을 만날 생각에 설레던 마음이 사그라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말 여기가 맞나 싶을 정도의 소규모 노점들이 몇 개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짧게 늘어선 먹거리 가판대에 떡볶이 대신 헌책들이 늘어져 있는 느낌이랄까.
왠지 모를 서운한 마음은 의외의 것들로 채워졌다. 가판대 근처 너른 거리 바닥의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스페인어로 쓰인 그 글자의 의미는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심상치 않아 보였다. 글씨 옆에 그려진 동물들을 보니 동물권 관련 구호 같았다. 파스텔톤의 정치적 목소리는 삼엄하기보다는 귀여웠다. 알록달록한 색감, 동글동글한 글씨체와 반원을 그리는 배열 덕에 무지개가 내려앉은 것 같았다. 반가웠다. 일상에서 피로했던 모든 것들, 이를테면 교통체증이나 날씨, 정치적 목소리들이 반가웠다. 찬찬히 볼 수 있으니까. 내 하루를 지치게 하는 단면, 그 너머를 충분히 바라볼 여유가 있으니까. 한 세계에서 찌들 대로 찌든 존재였던 내가, 다른 세계에선 모든 게 새로운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발길을 옮기며 또 하나의 새로운 공간으로 접어들었다. 왕립 식물원. 식물원이라고는 하지만 공원 느낌이었다. 습기가 느껴지는 온실 속에 들어가 이름표를 달고 있는 식물들을 보는 게 아니라 그저 넓은 실외를 걸어 다니면 되었다. 여기저기 거닐면서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고 있는 꽃들, 풀들, 나무들을 마주하면 되었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동물원의 동물들만 철장 속에 갇힌 건 아니었음을. 식물들도 비닐 속에 갇혔고, 나는 사고에 갇혀왔음을.
자유롭게 어슬렁대다가 괜스레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손대면 파랗게 물들어 버릴 것 같은, 쨍한 하늘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내보내는 햇볕의 따스함이 현실의 공간임을 인지하게 하는 연결고리였다. 그때 눈앞에 뒤뚱거리는 오리가 지나갔다. 오리라니! 한낮 대도시에서 오리라니! 엉덩이를 대고 있던 현실이 다시 저 멀리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현실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한가. 중요한 건 그 도시가 숨기고 있던 다양한 매력을 하나씩 들춰보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모든 건 한눈에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만의 반전 매력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