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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든든한 후원자에게

애증하는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by 정담아

<평범예찬>에 실린 글, '나의 든든한 후원자에게'의 초고입니다.




자본주의식으로 표현하자면 내 인생의 최대 지분을 가진 최대주주,

로맨틱하게 말하자면 인생에 볕이 들면 보이지 않다가 어둠 속에 허우적 댈 때 빛을 내는 별,

좀 더 현실적으로 설명하자면 내 생애 가장 강력한 애증의 대상.


어느덧 나는 당신이 나를 낳았던 그 순간보다 더 늙어버렸습니다. 당신이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한 생명의 엄마가 되어 새로운 삶을 꾸렸던 시기에 나는 여전히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허망할지 짐작이 됩니다. 더구나 당신은 내가 자신보다 훨씬 똑똑하고 잘났다고 믿었으니 말입니다.


겉으로는 당신의 인생과 내 인생은 다르다고, 당신이 나를 위해 모든 걸 희생했던 건 본인의 행복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나는 살면서 충분히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줬다고,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빚진 게 없다고 큰소리쳤지만 사실 내 마음은 그것과 정반대였습니다. 그 주절거림은 교육학개론이나 심리 이론 따위를 주워 들어 구성한 나를 위한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나는 현재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 부딪히면서 배운 마음에 따르면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족, 친구, 선생님 또 스쳐가는 많은 인연들의 사랑과 도움을 받았고 그 모든 감사의 순간들이 켜켜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됐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도, 내가 살아온 이 사회에게도 보답을 하며 살고 싶었는데 그게 마음먹은 대로 쉽지가 않네요.


어릴 땐 정말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이젠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 얘길 하고 나를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지금은 내가 그래도 되는 걸까,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원하는 걸 해야 하는 건 아닐까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내가 정말 어떤 능력이 있는 인간이긴 할까 싶다가도 왜 나 같은 인재를 세상은 몰라보는 거지 싶다가 나 같이 무능력한 게 뭘 처먹어서 뭐하나 싶다가도 훨훨 날아오를 미래를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지 싶고. 그냥 아무 일자리나 구해서 대충 살고 싶다가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지 싶고.


나는 도무지 뭐가 옳고 그른지, 내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대체 반백년 이상 수많은 선택의 기로 속에서 어찌도 그렇게 묵묵히 한 길만 걸어올 수 있었을까요.


못난 제 덕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해서, 무능력한 나 때문에 아직도 고된 몸 편히 쉬지 못하게 해서 한없이 죄스러운 마음뿐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기다리라는 말 밖에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얼마 전에 만난 언니 둘이 똑같은 말을 하더군요.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따로 만난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넌 좋겠다. 집에서 널 많이 믿어주나 보네."

솔직히 이전까지 미처 몰랐습니다. 운 좋게 집에서 얹혀살고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나는 꾸준히 돈을 벌었고 열심히 생활했다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는 마음까지도 있었으니까요. 그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마음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왜 늘 내가 가진 의무와 부담만 생각하고 내가 누렸던 권리에 대해선 까맣게 잊는 걸까요.


누군가는 내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아온 것 같다고. 그 말에 백 퍼센트 부정할 수 없고, 이론적으로 그건 옳은 삶의 태도가 아닌 것도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삶의 방식은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엔 내가 이미 당신에게 너무 많은 걸 받았으니까요.


자본주의 생리에 너무나 익숙하고 잘 적응했으며 정치와 사회, 문화 따위엔 관심이 없는 당신과 재테크 등 경제관념과 세상 물정에 어둡고 밥벌이 안 되는 정치나 사회, 문화 따위에나 관심을 보이는 나는 아마 앞으로도 수많은 시간을 피 튀기는 논쟁을 하며 보낼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꺾지 않는 곱지 못한 성질 머리는 똑같이 나눠가졌으니까요.


그래도 나는 행복합니다.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린 비록 가끔 눈물을 흘리고, 아주 가끔 고성이나 가시 돋친 말을 던져대지만 그런 시간을 통해 또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소통에 대해 배우며 더 가까워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요. 우린 서로가 가진 능력에 대해 제일 먼저 알아봐 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니까요.


앞으로 더 멋진 우리의 인생을 위하여,

Bravo, ou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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