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미얀마
성실한 베짱이의 여행을 담은 에세이 <길의 마음>에 실린 내용입니다.
한식이라고 부르기 주저하게 되는 짜고 단 맛의 식사를 마치고 근처의 강가로 갔다. 제대로 마주한 미얀마의 첫 풍경이었다. 야자나무 같은 활엽수들의 손짓을 보고 있자니 이곳이 정말 외국임을 느낄 수 있었다. 묽은 미숫가루 빛의 강 위에는 나무로 만든 날렵하고 작은 배들이 가방을 멘 어린아이, 셔츠를 입은 중년 남성, 힙색을 둘러멘 청년 등을 제법 촘촘하게 태운 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 강을 따라 육지에서도 나른하고 조밀한 몸짓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알록달록한 파라솔 아래 미얀마 특유의 빛깔을 담은 과일, 채소들이 늘어져 있었다. 길지 않은 행상들의 거리를 쭉 둘러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첫 번째 목표는 바로 노트북 충전기였다.
중심 거리로 향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평소 인파가 많은 곳을 꺼리지만 여기는 모든 것이 아직 신기한 미얀마 아닌가. 복잡해도 좋았다. 사람들의 패션, 표정, 걸음걸이까지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늘 그렇듯 발길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약국 거리로 보이는 곳을 지나니 전자 상가 거리로 짐작되는 장소가 나왔다. 그중 LG 마크가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자신 없는 표정으로 노트북 충전기를 사고 싶다고 이야기했더니 직원은 난색을 보였다. 터덜터덜 나왔지만 왠지 자신감이 조금 붙었다. 두 번째 가게에서는 핸드폰으로 노트북 기종을 보여주며 이 노트북의 충전기를 사고 싶다고 했고, 여러 직원의 손을 거쳐 드디어 기술자로 보이는 전문가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같은 회사의 제품은 아니었지만 충전 기능을 할 수 있다며 물건을 보여줬다. 역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나니! 기쁜 마음에 옳다구나, 구매하려는 찰나 갑자기 날카로운 이성이 내 머리를 스쳤으니, 나 같은 기계치가 갖추어야 할 미덕, 그것은 바로 확인이었다. 숙소에 노트북이 있는데 직접 가져와 테스트를 해봐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기쁜 마음에 쭐레쭐레 숙소로 향한 나는 금세 노트북과 함께 나타났다.
확인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건만 이게 웬걸! 구멍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절망하는 내 앞에 해결사가 나타났으니, 갑자기 직원 하나가 펜치와 전압기 체크기 따위의 기계를 들고 등장하는 게 아닌가! 아까의 전문가보다 한 수 위로 보였다. 피복을 벗기고는 그 안에 속살을 드러낸 얇은 구리선들을 거침없이, 하지만 섬세하게 구부리고 다듬었다. 몇 번의 손놀림 뒤에는 전압을 측정하는 듯한 행위를 취했다. 노트북 충전기에 푸른 불빛이 들어오자 그의 손놀림이 드디어 멈췄다. 그때까지 나를 비롯한 몇 명의 직원들이 그 모든 순간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그 동작들이 신비롭게 다가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기적의 순간을 직접 목도했다는 사실에 무척 고무되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갑자기 나와 대화 단절을 선언한 기계들이 타인의 손을 거치면서 제 기능을 회복하는 경험을 무수히 했지만 이렇게 날것의 전문적인 손길을 직접 보는 경우는 전무했다. 대부분 서비스 센터에 가서 접수하고, 기계의 오작동에 관해 설명하고, 대상물을 건네고, 약속 시각을 정하고, 며칠 후 수리가 끝난 그것을 돌려받는 행위만 있었을 뿐이었다. 정작 나의 물건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떻게 고쳐지는지 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동일한 로고가 찍히지 않은 물건들을 연결하는 작업과 그 과정에서 드러난, 매끈한 전선 안 날 것의 반짝임은 매우 생경했다. 그리고 그 신선함이 나를 콩닥콩닥 뛰게 했다.
미얀마는 그런 곳이었다. 매뉴얼과 브랜드라는 세련되고 그럴싸한 포장지를 슬쩍 걷어내면 보이는 날 것의 반짝임이 존재하는 곳. 당연히 우리에게도 존재할 아주 진부한 모습이겠지만 정작 내가 사는 곳에서는 쉽게 마주하지 못했던 생경한 풍경들과 마주하는 곳. 자영업자들의 특성을 뭉개버리는 체인점과 쓸데없는 절차만 가득한 관료제가 가득한 곳에 익숙했던 나는,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생활의 달인들이 도처에 숨어 있을 것만 같은 이곳이 벌써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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