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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oia May 03. 2019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 평을 쓰는 것이고, 세 번째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평론가 정성일






 누군가 내게 '영화를 사랑하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무래도 조금 멈칫할 것 같다. 뭔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매 달 작은 극장에 찾아가 독립영화를 챙겨보고, 선댄스 영화제 출품작 소식에 흥분하고, 누벨바그 영화를 탐미하며, 라스 폰 트리에 영화를 물고 씹고 뜯고 맛봐야 할 것 같아 그렇다. 안타깝게도 나는 위 조건들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작은 극장은커녕 멀티플렉스도 잘 찾아가지 않는 데다가 본 독립영화도 손에 꼽고, 선댄스는 이름만 들어봤다. 누벨바그는 수업 시간 때 고다르 작품 하나 본 게 다인데 그마저도 도중에 잠들었다. 라스 폰 트리에는 무슨, 박찬욱 영화도 잔인해 실눈을 뜨고 겨우 본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사랑하는 영화가 있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라따뚜이>, <토이스토리>, <시네마 천국>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내 취향은 지독하게도 편협해서, 이처럼 사랑한다고 말할 만큼 마음에 쏙 드는 영화를 찾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영화들을 여러 번 보곤 한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 혹은 이유 없이 들뜰 때, 혼자 있어 외로울 때, 혹은 혼자라서 행복할 때.


 얼마 전, 볕이 좋은 카페 한편에 혼자 앉아있던 나는 문득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떠올렸다. 내게 이 영화는 방 어느 구석에서라도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서랍장 안에 고이 넣어둔 연분홍빛 상자와도 같다. 그 상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크게 쓸모는 없지만 보면 기분 좋아지는 것들. 이를테면 반짝거리는 것들이 투명한 구 안에서 유영하는 것뿐인 그 찰나의 순간을, 황홀함이 집약된 영겁의 시간으로 만들어주는 분홍빛 스노우볼. 생긴 것이 지나치게 예뻐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 헌데 맛은 달고 쓴 연보라빛 사탕. 오래전 누군가가 남기고 간 흑백의, 하지만 어쩐지 다채로운 색들이 그 위에 흩뿌려져 있는 것만 같은 빛바랜 사진.

 난 그 날 그 상자를 한 번 더 열었다. 벌써 네 번째였다.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난 상자 안의 스노우볼을 이리저리 만지며 구경하고, 사탕을 입 안에 넣어 굴려보고, 빛바랜 사진 속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마침내 상자를 다시 닫았을 땐, 몇년 전 그 상자를 처음 받았을 때만큼, 아니 그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했다.


그러게, 누가 싫겠어요?



 나도 ‘시네필’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진 않았다. 사실 그 바람은 아직도 유효하다. 머리를 굴려가며 봐야 하는 좀 어려운 것들을 포함해, 많은 영화를 가리지 않고 보고 좀 그러면서 말이다. 그건 정말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벨바그의 선봉자 프랑수아 트뤼포에 의하면, 나 역시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을 아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보면서, 다르게 말해 기분이 내킬 때마다 상자를 열었다, 닫았다, 행복해하면서.

 그러니 앞으로 누군가 내게 ‘영화를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난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당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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