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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oia Nov 24. 2020

맞춤법 검사기


브런치에 참 오랜만에 접속해본다. 사실 오랜만에 접속해본다는 말은 거짓이다. 여러 번 이 곳을 방문했다. 비록 마지막 업로드는 작년 5월이지만, 내 글에 누가 ‘라이킷’을 했다는 알람이 울린지도 한참이 지났지만, 그래도 나는 이 곳을 자주 방문했다. 방문의 이유는 조금 궁색하다. 맞춤법 검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네이버 맞춤법 검사기는 최대 500자가 끝이다. 자기소개서 한 문항은 대체로 1000자 안팎이다. 어쩌다가 마음씨가 좋은지 고약한 것인지 모를 방송국이 500자짜리 문항을 내준다고 해도, 500자로 글을 갈무리하기 위해서 적어도 700자는 써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브런치 맞춤법 검사기는 글자 수 제한이 없다. 당연한 소리다. 그건 정식적인 맞춤법 검사기가 아니라, ‘글만을 위한 플랫폼’이라는 이 사이트가 갖춰야 할 아주 기본적인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친절하다. 이 틀린 맞춤법을 고칠 것인지, 아니면 그냥 넘어갈 것인지 물어봐준다. 내가 굳이 틀리게 쓴 단어를 제멋대로 고쳐버리는 한글 어쩌구와는 다르다. 날 존중해준다. 그래서 내 몇 없는 대외활동 경력 중 하나인 ‘인문쟁이’가 ‘인문 쟁이’가 아닌 ‘인문쟁이’로 존재할 수 있게 한다.


위에서 방송국이라고 말했다. 방송국에 자기소개서를 낸 지 1년 정도가 지나간다. 나는 pd 지망생이다. 어디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부끄러웠다. 왜냐면 내가 ‘pd를 준비 중이다.’ 고 말하거나, 누가 나를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이다.’고 칭해줄 때면 거의 반자동적으로 나오는 리액션들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대부분 ‘멋지다.’ 혹은 ‘우와’라고 말해준다.. 그게 진심일 수도, 그냥 대화를 잇기 위한 가느다란 다리일 수도 있지만서도 난 그럴 때면 과장스럽게 “에휴 아니에요” 하고 손을 절레절레 젓곤 한다. 그리고 빨리 대화 주제가 넘어가길 염원한다. 여기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난 원체 칭찬이나 추켜세워주는 것은 간지러이 여기는 사람이다. 둘째, 내가 실제로도 ‘pd 지망생’이라는 스스로의 지위에 대해 약간의 우월감을 갖고 있어서다. 그리고 셋째, 그 우월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해서다.


마지막 이유가 크다. ‘pd’도 아니고 ‘pd 지망생’이란 신분에 우월감을 갖고 있는 내가 창피하다. 난 올해 지상파 종편 케이블을 망라하고 여덟 곳 정도에 자기소개서를 넣었지만 단 한 곳에만 붙었고, 그마저도 바로 그다음 관문에서 탈락했다. 또 이런 고백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자면 바로 “작년에는요, 그냥 시험 삼아 두 곳을 넣어봤는데 두 곳 다 붙었어요.”라고 첨언하고 싶어 진다. 그게 부끄럽다. 정말 그 알량한 성과를 굳이 굳이 얘기해서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지는 내가 부끄럽다. 또 이런 말도 하고 싶어 진다. “올해 코로나 때문에 서류를 너무 거르더라고요. 어느 방송국은 서류를 70명만 뽑은 것 있죠. 면접이 세 개나 더 있는데.” 봐봐, 아닌척하면서 여기에 또 내가 쓰고 싶은 변명을 다 썼다. 이제 좀 마음이 편해진다. 동시에 더 부끄러워진다.


내가 올해 쓴 자기소개서의 글자 수를 머릿속으로 가늠해본다. 어느 방송국 한 곳은 10,000자를 넘게 받았다. 그래도 좀 양심 있는 곳은 5,000자 정도 받고, 4,000자 정도가 평균이다. 3,000자 밑으로 원하는 곳은 더 까다롭다. 길게 길게 풀어서도 못 쓰는 글을 압축해 써보자니 더 엉망이다. 아무튼 평균으로 봐도 32,000자 정도를 쓴 것인데 거의 모든 글자들이 의미를 잃었다. 정말이다. 그나마 서류 통과라는 찰나의 기쁨을 맛본 글들은 내 하드에 저장되어 몇 번이고 다시 읽히지만, 그렇지 못한 글들은 (서류 통과된 글과 별반 다를 게 없는데도) 다시 열릴 일이 거의 없다.


나는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 자기소개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글을 쓰는 것을 즐기는 척하지만, 실은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내 글을 누가 읽고, ‘너 글 잘 쓴다.’고 얘기해주거나 아니면 ‘맞아 나도 이런 생각 종종해’라고 공감해주거나 아니면 하트라도 눌러줬으면 좋겠다. 그런 게 없는 글쓰기에 사실 나는 관심이 없다. 어쩌면 이게 내가 일기를 쓰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아무게도 읽히지 않을 글, 아무도 읽지 않아줬으면 하는 글은 쓰기 싫다. 어쩌면 난 글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진짜 사랑하는 건 글을 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올해는 오랫동안 혼자 글을 쓰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긴 글들을 쓰고 또 고치고 쓰고 또 고치고. 그러고 보니 내 글을 가장 정성 들여 읽어준 건 브런치 맞춤법 검사기라는 생각이 든다. 틀린 것을 고쳐주고, 때로는 받아들여주면서.

난 이 글을 또 맞춤법 검사기에 맡길 것이다. 언시생 필수 자격증이라는 kbs 한국어 능력시험을 아무리 공부해도, 그 결과 꽤 높은 성적을 받아도 내 띄어쓰기와 맞춤법은 여전히 엉망이다. 맞춤법 검사기는 넓은 아량으로 그런 날 감싸줄 것이다. 솔직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쿨해 보이고 싶어 하는 괴상한 이 글을 꼼꼼히 읽어볼 것이다. 아주 기초적인 띄어쓰기를 일러주고, “‘있지만서도’란 말은 틀린 것이고 ‘있지만’이라는 말이 맞는데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싶니?”라고 따스히 물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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