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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강 Jul 08. 2021

삶에 대한 집착

모두가 언젠간 떠나요

     

수시로 자살 충동을 느꼈으면서도 나는 한편으로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었다. 고뇌와 고통은 회피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일과 가족, 친구들 모두와 싹 이별하는 것은 너무 큰 두려움이었다. 그건 나만의 욕심이 아니었다. 모든 인간은 인간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계속 노력해왔다. 그렇게 해서 현대인의 수명이 길어진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개인에게는 축복일 수 있다. 그렇지만, 정작 사회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그 내용을 많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이야기한다.      

추첨을 통해 죽어야 할 사람을 정함으로써 인구를 조절한다는 호시 신이치의 <생활유지부>, 100세가 되면 무조건 죽는 것이 법이 된 미래를 그린 야마다 무네키의 <백년법>, 70세 생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죽어야 한다는 법안이 통과된 이후의 삶을 보여주는 가키야 미우의 <70세 사망법안, 가결>, 한 명이 태어나면 한 명이 죽어야 한다는 설정의 커트 보니것의 <2BRO2B>(To be or not to be) 그리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황혼의 반란>이 그러하다. <황혼의 반란>에서는 70세가 넘은 노인들이 끝내 죽기를 거부하고 도망치자 그들을 좇던 정부가 독감 바이러스를 이용해 마침내 뜻을 이룬다. 소설 속 정부는 노인복지 제도 때문에 국가 재정에서 적자가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 작품들을 보면 다수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인구는 반드시 조절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인간이 너무 오래 사는 것이 무조건 선은 아님을 알게 된다. 오래 사는 것은 여전히 모든 인류의 간절한 바람이지만, 제한된 재원 안에서 그것이 어쩌면 공동체의 이익에는 반할 수 있다는 진실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물론 위의 소설들처럼 인위적으로 인명을 조절하는 것은 잔혹한 일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인간의 삶을 무한정 연장하는 것 역시 무자비한 일이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의식이 전혀 없는 환자에 대해 치료 효과가 없음에도 일단 연명치료가 시작되었으면 그것을 결코 중단할 수 없었다. 그런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의 고통은 고스란히 그들의 몫이었다. 그러다가 2009년 무의미한 연명치료 장치 제거를 허락하고 ‘존엄사’를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졌고 2018년 제도가 도입되어 이제는 개인이 먼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두거나 가족의 합의가 있으면 무의미한 삶의 지속을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 기사에 의하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사람의 숫자가 해마다 늘고 있다고 한다. 가까이에서 연명치료 환자를 겪은 사람은 더욱 빨리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 같다. 무조건 오래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시각은 이제 바꾸어야 한다. ‘더 오래’ 보다는 짧더라도 ‘더 인간답게’ 사는 것이 인간이 바라는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 <미 비포 유Me before you> 는 안락사를 계획하고 있던 남자 윌과 그를 돌보던 간병인 에밀리아 루이자 사이의 짧았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무료시사회에 당첨되어 혼자 참석했던 내게 영화는 충격이었다. 비록 전신마비 환자이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한데다가, 사랑스러운 여친도 생겼는데 윌은 집요하게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그는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것에 전혀 미련이 없었다. 나는 계속 ‘그렇지만 너무 했어’와 ‘그래도 살아야지’를 반복하다가, 가까스로 만약 내가 윌의 입장이었으면 어땠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 상태에서 그의 삶은 온종일 누워서 다른 사람의 손길만 기다리는 화초 같은 삶이었다. 그는 달리고, 뛰고, 격렬히 표현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숨만 쉬며 누워있는 것은 삶이 아니었다. 나라고 다를까. 나도 그렇다. 운동은 싫어하지만 내 몸을 직접 움직여 내 의지대로 고양이를 만지고, 남편을 끌어안고, 주변을 정리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 남의 의지에 나를 맡기는 게 아니라 내 의지대로, 내가 알아서 움직이고 싶은 것이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무슨 낙이 남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주변에 폐만 끼치고 있다는 자괴감도 자라날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그래서 더욱 미련 없이 그 사람을 위해 떠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시간은 걸렸지만, 마침내 나는 윌을 이해하게 되었다.      

삶은 언젠가 끝난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만 매 순간 충만히 산다면 떠나야 할 시간을 맞이했을 때, 뒤늦게 삶의 길이에 집착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열심히 살 수밖에. ‘Live boldly, Push yourself. Don’t settle.(대담하게 살아요. 끝까지 밀어붙여요. 안주하지 말아요.)’ 영화 속 윌이 루이자에게 남긴 당부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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