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작가는 정부인 장 씨의 눈과 입을 통해 부모의 딸로서, 군자의 지어미로서, 자식들의 어미로써, 자손들의 할머니(큰어머니)로써, 세상의 어른으로써, 이 모든 역할의 주인인 여성으로서의 마음가짐과 삶을 지어가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대의 시각에서 본다면 더없이 불합리, 불공정한 조선시대 여성의 역할을 묘사하되, [선택]이라는 능동적인 단어 하나를 통해 부조리의 벽을 허물어버린다. [순응자]로 처량하게 당대의 삶을 사는 것은 - 현대 시각으로는 당시 여성들의 삶이 처량했다 표현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몹시 고단하고 허망한 삶임을 부인하기 어려우나, 시대의 질곡에서도 [선택자]로서 삶을 받든다면 보람과 성취를 찾을 수 있음을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게 아닌가 한다.
장 씨는 어린 시절 당시 여성들이 누리지 못한 학문을 익힐 기회를 운좋게 얻는다. 총명하고 재주도 넘쳐 두각을 보인다. 하지만 나이가 차자 학문을 포기하고 시집을 가야할 시대적 한계 앞에 서게 된다. 장씨는 이 때 여성의 한계에 저항하는 대신 이러한 차별 또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낮추고 상황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다. 더 나아가 장씨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순응하기보다 스스로가 이 삶을 [선택]하는 것이고, 자신의 [선택] 안에서 의미와 역할을 찾겠다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다짐을 하게 된다.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선택]이라는 것이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여성의 태도만 의미한다고 보지 않는다. 남녀노소 구분 않고 세상사 곳곳에서 [선택]은 통용된다고 본다. 삶 구석구석에서는 수많은 부조리가 존재하고, 우리는 이 부조리 앞에서 늘 자신만의 선택을 한다. 작가는 모든 이들이 수많은 선택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장씨 이외의 인물들(부모, 시부모, 남편 등) 삶을 통해 표현해 내고 있다.
한편 작가는 매섭게 꼬집는다. 여성 고유의 고귀한 출산 및 양육의 권리를 회피하고 남녀의 원천적 역할 구분조차 부정하는 일부 과격한 현대여성에게 미리 삶을 살아온 딸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써, 할머니로서의 장 씨 입을 통해 훈계한다. 듣는 이에 따라서는 이 훈계가 몹시 매섭고 오장육부를 후벼 팔만큼 신랄하다 하겠지만 너른 마음으로 살피면 과격한 여성들을 지혜롭게 다독이고 있음을 엿볼수 있다. 또한 과격한 범주에 포함되지 않은 다수의 여성에 대해서는 존경을 표함과 더불어, 집안과 사회의 한 축으로서의 여성을 치켜 올리는 온정 어린 묘사 또한 가득하다. 현명한 아내, 엄하되 어진 어미, 효심 한 딸과 며느리, 어른으로써 사회적 역할속에서 사람과의 관계를 잇는 지혜와 통찰을 조목조목 꺼내 놓는다. 사랑하는 이에게 전하는 귀한 유품처럼.
이 책을 다른 관점에서 읽는다면, 성(性)에 대한 논의 외에 동서고금을 초월한 보편적인 가치 또한 살필 수 있다. 가정을 구성하고, 자손을 번성하며, 이웃을 돕고, 국가에 도움되는 삶을 추구하는 인간상도 볼 수 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해 있는 현대의 삶을 살다 보면 효(孝)가 무엇이고, 충(忠)이 무엇이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찾지 않기 마련이다. 작가는 글 곳곳에서 선비들이 읊는 시와 염원을 서술함으로써 효와 충과 예의 본질을 하나씩 짚어간다.(선비들의 비효율적인 생산성은 논외로 하고) 이를 통해 부조리와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과 불변하는 정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비열한 경쟁이 만연한 현대 시대 염증을 긁어내 보려는 듯이.
솔직히 말하자면 초중반까지는 논란이 되었던 과도한 페미니즘에 대한 일갈(?)로 보여지는 몇 몇 문장에서 적당한 통쾌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페이지를 거듭 넘길수록 그 문장들은 페미니즘과의 대척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 되려 적대감이 떠오르는 대신 따뜻하게 손 잡아주는 내 어머니가 떠오르고, 내 근심을 지우려 애쓰는 고마운 아내가 보인다. 쌈지에서 꼬깃한 지폐 한장을 꺼내 쥐어주시던 할머니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과한 감상에 젖어보자 함이 아니다. 마음을 열고 본다면 정부인 장 씨의 역할마다의 모습 속에서 아내와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 없다.
이 책은 조선시대 배경에 한자가 많이 사용된 글이라 얼핏 훑으면 읽기 부담스럽고 지루해 보인다. 하지만 이해 안 되는 한자는 대강의 의미를 추측하고 넘기는 방식으로 읽다 보면 단숨에 읽히는 책이다. 작가는 어려운 한자들로 인해 독자들이 느낄 수 있는 다소간의 불편함을 강력한 필력으로 해소시키기에 초반의 지루함을 참고 끝까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다 보면 말미에는 자신을 둘러싸고 관계하는 모든 여성, 그 존재에 대해 깊게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