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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시인 Jan 08. 2020

후회하지 않을 후에에서

다낭, 후에, 호이안을 다녀와서

            1. 상처 속에 피는 꽃  

   

     연못 가득 연잎이 돋아 있었다. 한국에서 본 푸르고 싱싱한 커다란 잎들이 아니라 손바닥 둘을 나란히 놓은 듯한 크기의 잎들은 곳곳이 햇볕에 탄 듯한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고궁 연못의 연잎들은 마치 색이 바랜 단청처럼 탁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도 주먹만 한 연꽃들을 무수히 틔워 올리고 있었다.

후에 왕궁의 정문


   성을 방어하기 위해 파놓은 해자를 지나, 성문으로 들어서자 오랜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낡은 왕궁이 펼쳐졌다. 궁은 1805년 자롱 황제의 명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하여 1832년 민망(Minh Mang) 황제 시기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왕궁은 프랑스 건축가인 바우반(Vauban)의 설계에 따라 프랑스와 베트남식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세워졌다고 한다. 

    여행자 거리에서 20여 분 걸어 도착한 왕궁은 후에를 관통해 흐르는 흐엉강 강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궁의 첫인상은 건축된 시기에 비해 더 오래되어 보인다는 것이다. 왕궁이 세워진 이후에 겪은 혼돈과 전란의 상처를 여실히 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2 다시 베트남에, 이번은 다낭

     

  우리 일행이 베트남에 도착한 것은 무더위가 한창인 7월 9일이었다.

같은 직장 동호회인 인문학 포럼에 소속된 나보다 열두셋 아래 연배의 후배들이었지만 평소 우리는 격의 없이 지내던 사이였다. 그들은 나의 제안에 흔쾌히 찬동했고 우리는 5박 7일의 일정으로 베트남의 다낭, 후에, 호이안을 돌아보기로 했다. 우리가 여행을 결정한 것은 출발 일주일 전, 나는 부랴부랴 비행 티켓과 호텔을 예약하고 여행안내 책자와 인터넷 블로그 검색을 통해 일정을 짰다.

  다낭 3박, 후에 1박, 호이안 1박 일정이었다. 호텔은 대체로 2성급으로 1박에 1인당 우리 돈 2만~3만 원 정도에서 예약해두었다. 7월 초는 아직 성수기가 아니라서 그런지 왕복 비행 탑승요금은 30만 원 후반대에서 예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빠듯하게 책정된 예산 탓에 저가 국내 항공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9일 오전 10시 30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여객기가 다낭에 내린 것은 두 시간의 시차가  적용된 오후 1시 30분, 대략 입국 수속을 받고 나서자 뜨거운 열기가 우리를 반겼다.  베트남에 온 것은 이번이 4번째라 그런지 처음 닿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다낭의 열기와 냄새는 낯설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이십 여분 시내를 관통하여 도착한 우리의 숙소는 다낭의 명소인 성당과 시장이 가까운 시내 한가운데였다. 작은 창문 너머로 한강(다낭의 강의 이름도 한강이다.)이 보이고 국제조명디자인협회의 최고상을 받았다는 용교(Rong Bridge)가 강을 가로질러 놓여 있었다.

새벽의 한강과 용교를  사진으로

    호텔에 여장을 풀고 나서 우리 일행은 다낭 시내 산책을 나섰다. 먼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쌀 국숫집에 들어섰다. 4만 동, 우리 돈 2천 원에 돼지고기 고명이 듬뿍 얹힌 쌀국수가 그릇 가득 나왔다. 숙주와 내가 좋아하는 고수를 듬뿍 넣어 오랜만에 베트남의 맛을 즐겼다. 소고기 쌀국수인 퍼보, 돼지 불고기와 국수를 육수에 넣어 먹는 분짜, 돼지 불고기와 밥과 야채를 함께 먹는 껌땀, 쌀가루에 갖은 고명을 넣어 달걀물을 입혀 부친 반쎄오, 바게트 안에 고기와 야채 그리고 소스를 가미해 만든 반미는 이미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음식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먹는 것과 현지에서 맛보는 것은 재료와 분위기 탓인지 아주 다르다. 특히 식사 때면 길거리 어디서나 베트남인들이 즐기는 퍼보와 껌땀, 반미는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값도 가장 저렴하다. 내가 처음 베트남에 왔을 때 장터의 허름한 의자에 앉아서 우리 돈 800원의 껌땀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다시금 새로웠다. 

   값싼 만찬을 즐기고 나서 우리는 1923년 프랑스 신부가 건설했다는 다낭 성당을 보러 나섰다. 분홍색 도료가 칠해진 성당은 프랑스 식민 시대에 유럽풍으로 건설되었다는  것 이외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다낭 성당은 비슷한 시기에 건설된 호치민의 성당과 비교해도 규모나 세부적인 면에서 단순하고 소박했다. 오히려 내가 사는 안성의 100년 된 목조 성당보다도 문화적 가치는 떨어질 것 같았다.

   우리는 대략 성당을 둘러보고 나서 성당 바로 앞에 자리한 한 시장(cho han)을 둘러보았다. 채소와 과일, 생선과 육류를 파는 1층을 지나 2층으로 올라서자 의류와 신발, 화장품, 기념품 등을 판매하는 작은 가게들이 연이어 이어졌다. 특히 2층에는 베트남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를 판매하는 곳이 여럿 있었다. 가끔 한화로 2만 원쯤 하는 아오자이를 입고 관광을 나선 한국의 젊은 여성들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들도 이곳을 들렀을 것이다. 나는 시장 2층에서 땀을 흘리면서도 열심히 물품을 골라준 젊은 점원의 성의에 답하는 뜻으로 모자를 하나 샀다.

   다낭의 날씨는 37~38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햇볕이 내리쬘 때는 마치 사우나를 방불하게 한다. 그늘을 찾아 걸어 다녔지만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아직 열기가 기승을 부리는 오후 서너 시에 걸어 다닌다는 것은 무리다. 현지인들도 이때에는 밖으로 나서는 것을 삼간다. 해가 지고 나서 선선해지면 다들 강변과 거리로 나선다. 그래선지 길거리에서 흔히들 마주치는 사람들은 한국인 관광객들이다. 특히 젊은 세대의 관광객들이 대다수이다. 마치 다낭이 한국인들의 휴양지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태국의 파타야, 필리핀의 보라카이, 중국의 북경을 거쳐 이젠 다낭과 하노이가 대세인 듯하다. 특히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이유는 값싼 경비, 비교적 안전한 치안, 해안을 끼고 있는 도시 풍광 등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낭은 내세울 만한 유적지나 관광명소가 많지 않다. 주변에 한국인들이 꼭 들르는 바나힐, 응우한쎈(마블 마운틴)과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미케 해변 등도 있지만 다낭은 휴양도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다낭을 가로질러 흐르는 한강. 해가 떨어지자 강바람이 시원하다. 우리는 강변을 산책했다. 롱교(Dragon Bridge)를 건너 한 시간 넘게 시내를 걸어 다녔다. 등불을 환히 밝힌 채 강변을 떠다니는 유람선과 불을 밝힌 각종 조형물, 다리를 비추는 색색의 조명으로 도시는 화려함을 연출하고 있었다. 내가 “저렇게 불을 밝히려면 전기도 엄청나게 소모될 텐데?”라고 말을 꺼내자 후배가 “베트남은 산유국이잖아요!”라고 답한다. 형형색색의 등과 조명으로 불야성을 이룬 다낭의 밤, 마치 불나방 같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려는 욕망과 의도가 원색의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3 극한체험, 자전거 탐방     


  여행을 설계한 내가 다낭에서 둘째 날의 일정으로 잡은 것은 바나힐 혹은 오행산(응우한쎈)에 가는 것이었다. 바나힐은 1400m 높이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 프랑스식의 건물들과 놀이동산이 있는 휴양지이고 오행산은 석회암이 침식된 독특한 풍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행 중 자전거를 즐겨 타는 후배의 제안에 의해 바뀌고 말았다.

   관광객 누구나가 간다는 번잡한 바나힐이나 오행산에 가는 대신에 자전거 탐방을 하자고  후배가 제안했다. 1인당 한화 4만 5천 원에 오전 8시에 호텔 앞에서 출발하여 오후 1시까지 다낭과 호이안 지역의 곳곳을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는 일정이다. 무더위에 힘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나에게 그는 여성들과 아이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투어라는 점을 강조했다. 평소 주말이면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과 어울려 전국 곳곳을 종주한 그에게 자전거 투어는 아마 매력적인 프로그램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침 8시 호텔 앞에서 우리를 태운 소형버스 안에는 이미 미국인 둘이 타고 있었다. 부자지간인 그들은 통신업계에서 은퇴한 아버지와 대학 미식축구 선수라는 대학에 재학 중인 아들이었다. 차는 40분 정도를 달려 호이안의 외곽에 정차했다. 그리고 현지 인솔인 두 명은 자전거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내가 자전거를 탄 것은 십 대 후반 고등학교에 통학할 때였다. 그리고는 기억이 없다. 40여 년 만에 타보는 산악자전거에 올라타고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도로로 나섰다. 20여 분 차도를 달리다가 처음 닿은 곳은 각종 채소농장이 있는 마을이었다. 그 후로 논길, 호수, 강변을 지났다. 가다 마주치는 자전거 투어를 하는 관광객의 거의 모두는 유럽인들이다. 한국이나 동양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 탐방 중 들른 작은 항구
한 시간 뒤에도 그는 여전히 소 등에 있었다

   오전 9시 무렵 출발한 자전거 투어는 10시 30분이 되어서야 시골 장터에 들어섰다. 한 병의 생수를 모두 마시고 중도에 이온 음료 한 병을 더 마셨지만, 갈증이 지속하고 있었다. 37도를 넘나드는 열기와 뜨거운 햇빛 탓에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다. 얼굴과 팔에는 선크림을 듬뿍 발랐지만, 크림을 바르지 않은 종아리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쉬는 동안 나는 장터에서 주먹만 한 파인애플을 샀다. 두 개에 1500동 우리 돈 750원이다. 동료들에게 권했지만, 위생을 우려한 탓인지 그들은 사양했다. 나만 1개를 먹었다. 예상보다는 심심한 맛이다. 

   투어 도중에 현지인 가이드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산을 오른다고 했다. 또한 은퇴한 나보다 네 살 적은 미국인은 평소에 로드 자전거를 탄다고 했다. 가이드를 포함한 일행 일곱 중 다섯은 이미 자전거에 프로라고 간주할 수 있고 체력들도 대단한 것 같았다. 야자수가 늘어선 마을과 작은 포구를 지나자 맨 뒤에 처진 후배가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달려 나갈 때 우리를 맞이하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지만 따가운 햇볕과 발밑에서 올라오는 지열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결국 사달이 났다. 평소 운동이라면 담을 쌓고 있던 후배가 탈진된 것이다. 이미 20여 킬로를 달려왔지만, 목적지까지는 7킬로 정도가 남았다고 했다. 그는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소금물을 그에게 권하며 나는 걱정과 함께 후회가 밀려왔다. 여유 있게 현지의 삶을 돌아보고자 했던 의도와는 달리, 마치 극한체험 혹은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투어에 나도 지쳐 있었다. 사실 경추 수술 이후 착용하고 있던 목 보호대를 벗어던진 것이 베트남으로 출발하기 1주일 전이었다. 나의 몸이 아직 정상이 아님에도 스스로 무리했다는 자책감도 함께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선택한 투어인 것을… 마침내 그 후배는 자전거를 포기하고 현지에서 급구한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출발지로 되돌아갔다. 반면 그와 띠동갑으로 윗세대인 나는 그 뒤에도 거친 시골길, 언덕, 다리, 강변을 거쳐 출발지에 다시 도착하였다. 엉덩이도 얼얼하고 종아리는 햇볕에 타고 온몸은 이미 땀범벅이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생수 한 병을 모두 들이마셨다.      

     

    4 상처를 안고 있는 후에 왕궁에서     


    침대 버스는 후에를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 

    19세기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곳까지는 대략 2시간 반. 어제의 피로가 풀리지 않은 탓인지 근육도 굳어있고 잠도 오지 않는다. 

   버스는 도심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간헐적으로 보이는 산들과 강, 고무나무 농장을 지나 고개를 넘고 있었다. 육체적인 피로 때문인지 마음의 여유도 누릴 수가 없다. 일상에서 해방된 자유로움과 모든 긴장을 내려놓는 것이 여행의 즐거움일 텐데, 후에가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누군가가 ‘후에는 기대하고 와서는 후회하고 가는 곳’이라고 혹평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어쨌든 여행을 계획하고 이끄는 리더로서의 책임감이 또한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다.

숙소에 바라본 후에 시가지

  후에는 34만 정도의 인구가 거주하는 비교적 작은 도시다. 다낭에 비해서는 한가로운 분위기다. 우리가 예약한 호텔은 외국인 거리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체크인하기 위해 잠시 기다리는 사이에 점심을 어디에서 먹을 것인지에 대한 대화가 오고 갔다. 그때 여행 앱을 검색하던 후배가 우리가 묵을 호텔 1층의 식당이 여행객들이 최고로 추천하는 음식점이라며 “이런 우연이… ”라고 말을 건넨다. 몇 가지 현지 음식이 코스로 나오는 식당은 평범한 분위기였지만 음식은 깔끔하고 맛있었다. 동료들이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어려 보이는 웨이터들에게 1달러씩 팁을 주었다.


   호텔에서 걸어서 후에 왕궁에 가기로 했다. 그러나 대낮의 햇볕과 어제의 피로가 산책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의 주장에 의해 한화 천몇백 원 정도의 택시비를 지불하고 우리는 후에 왕궁의 정문 앞에 내렸다.  

    정문을 지나자 양쪽의 인공연못을 끼고 태화전이 보였다. 붉은색 기와가 얹힌 궁궐들은 거의 모두 벽돌로 건축되어 있었다. 게다가 궁궐의 담까지 구워진 붉은 벽돌로 둘려 있어서 푸른 나무와 풀들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걸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장방형의 왕궁은 태화전을 비롯하여 연수궁, 장생궁 등 황제가 부모를 위해 지은 궁들도 있었지만, 역대 황제의 위패를 종묘와 사원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금성과 같은 궁은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의 폭격에 의해 폐허로 변했고 지금도 그 상태로 남아 있었다. 허물어진 담장, 총탄 자욱이 아직도 선명한 곳곳의 상흔은 지난 아픈 역사를 그대로 증거하고 있었다. 황색으로 칠해진 왕궁의 벽, 붉은색으로 단장된 기둥과 문, 은색으로 칠해진 화려한 용의 문양 등 색감이 바래어 있지만 서로가 미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궁궐 기둥에 기대어 나는 사진을 찍었다.

전쟁으로 무너진 왕궁터

   후에의 왕궁을 조선조의 우리의 왕궁과 비교해본다면 규모는 작지만 오밀조밀하고 화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곳곳의 무너진 왕궁과 상흔은 허무의 정조까지 띠고 있었다. 왕궁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와 궁 내의 인공연못에는 연들이 심어져 있었으며 마르고 시든 연잎들 사이에 연꽃들이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연들은 내가 한국에서 본 그것들과는 달랐다. 푸르고 싱싱한 잎이 아니라 햇볕에 마르고 군데군데 타버린 얼룩이 있는 비교적 작은 연잎들이었다. 상처 받고 힘겨워 보이는 연잎들 사이로 꽃대가 솟아있었고 그 위에는 선명하지는 않지만, 연분홍의 색감을 띤 연꽃들이 피어 있었다. 몇몇은 이미 지고 몇몇은 봉오리가 맺혀 있고 또한 몇몇은 이미 꽃은 지고 연밥만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비교적 여유 있게,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한산한 궁과 종묘를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한국인 관광객들 다수는 별도의 요금이 적용되는 전기차로 왕궁 주변을 투어하고 있었다. 달리는 말에서 산을 본다는 주마간산(走馬看山)이란 말처럼 그저 흘깃 보고 가는 여정 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감들을 우리는 만끽하고 있었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를 건너서 궁의 모퉁이를 혼자 돌아설 때 혼자서 걸어오는 갈색 머리칼의 유럽 여성과 마주쳤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그녀도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그녀는 영국에서 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내게 ‘언빌리버블’(unbelievable)라고 말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다는 뜻이다. 

  전란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는 이백 년 된 왕궁, 과거의 영광과 화려함이 바래어진 채로 세월과 역사를 증거 하는 후에의 왕궁은 다낭의 현란한 불빛과는 대조되는 진정 베트남의 참모습으로 다가왔다. 허무함과 쓸쓸함이 깃들어 있는 후에의 왕궁, 나는 그곳에서 권력과 욕망의 찬란함과 더불어 무상함도 보았다. 그곳은 절대 후회할 곳이 아니었다. 그 뒤에 나는 그 당시의 심정을 한 편의 시로 쓸 수 있었다.

응우엔 왕조의 10 번째 황제인  타인타이제(베트남어: Thành Thái/ 成泰 성태, 1879년 3월 14일 ~ 1954년 3월 24일)가 지었다는 한시 편액


먼 후에 다시 올 수 있을까.

시든 연잎이 눈물겹게 꽃대를 밀어 올리는 연못가,

해자垓字에 얹힌 낡은 다리를 건너 

반쯤은 다시 쌓은 성문을 지나면

한때 금빛 용이 날아오르던 붉은 기와의 궁과 전각들.

낯선 습한 바람을 따라 걷는다. 

총격과 포탄의 흔적을 그대로 안고 있는

무너진 담과 종묘와 궁궐터가 보이고

뜨거운 대낮에 지는 꽃 피는 꽃.     

新韶淑氣滿春城 

아름답고 맑은 봄기운이 성에 가득하다는

황제가 지었다는 시 한 구절이 

쓸쓸해 보이는 늦은 오후  

황성에는 주인은 없고 객들만 번잡하다.

추녀 위 잡상雜像으로 올려진 늙은 기린 한 마리 

눈 부릅뜨고 지는 해를 바라보는데

구름무늬가 조각된 돌기둥에 기대어 홀로 꿈꾸어 본다.

후에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拙詩 「후에를 떠나며」 전문          

     

      5 실망, 세계문화유산 호이안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한 뒤 침대 버스로 호이안까지 가기로 한 일정을 택시로 이동하는 것으로 바꿨다. 호이안까지는 대략 4시간 거리, 침대 버스로는 대략 셋에 2만 원이면 충분하지만, 택시로는 한화 5만 원…

    호텔 로비의 직원이 소개한 호이안까지의 여정은 새로 난 터널로 가는 길이 아니라 구도로를 통해 다낭 그리고 호이안으로 가는 것이었다. 구도로는 바닷가와 험한 재를 넘어가는 것으로 중간에 몇몇 명소를 잠시 들르는 일정이다. 이동과 함께 투어를 하는 것이라면 사실 그리 비싼 일정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택시로 가는 방편을 선택한 것이다.

    기사는 스물여섯의 곱상한 사내였다. 이미 결혼은 했다고 한다. 비교적 영어도 능통하여 불편한 점은 없었다. 일본제 소형차에 몸을 싣고 우리는 해변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중간에 굴 양식장 곁의 휴게소에 들러 음료를 마시고 바닷가 고갯길에 잠시 정차하여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돌아서 가는 일정이지만 지루할 사이 없이 풍경이 아름답다. 

다낭과 후에의 중간 쯤에 위치한 랑코의 강과 바다를 담아서

    한참을 달려서 우리 일행은 굽은 만을 끼고 있는 다낭의 시내가 멀리 보이는 하이번 고갯길에서 휴식을 취했다. 안내 책자에 의하면 하이는 바다(海)란 뜻이고 번은 구름(雲)을 뜻한다고 한다. 높이는 대략 500미터 바다와 함께 멀리 다낭 시내가 보이는 웅장하고 장엄한 풍광에 우리 모두 매료되었다. 그리고 택시로 가는 일정을 선택한 것이 옳은 결정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 코스를 추천해준 호텔 여직원의 친절에 뒤늦게나마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닷가 연안에 위치하면서 투본강을 끼고 있는 호이안은 15세기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했던 곳이며 아시아와 유럽의 상인들이 드나들던 상업과 무역의 도시였다고 한다. 특히 중국과 일본 상인들이 정착하면서 그들이 남긴 목조 가옥과 다리 등이 유명한 것으로 전통 가옥과 거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다낭을 다녀간 사람들은 호이안을 최고의 명소로 꼽았고 특히 해가 지고 나서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되는 등불축제는 꼭 보아야 할 이벤트라고 했다. 

호이안 시장 옆 거리

   우리가 바닷가인 끄어다이 해변 옆의 호텔에 여장을 푼 것은 오후 2시 무렵이었다. 점심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입장이어서 뜨거운 대낮임에도 우리는 택시를 타고 호이안 올드 타운까지 이동했다. 천 교수가 반미가 유명한 곳이 있다고 하며 그곳에서 점심을 해결하자고 한다. 점심때가 한참 지난 시간이지만 반미를 파는 식당 앞은 줄을 서 있었다. 줄 선 사람 중 절반은 한국인인 것 같다. 한화 이천 원의 반미와 오백 원 정도의 콜라를 사 들고 이층으로 올라서 늦게 점심을 때웠다. 반미는 기대만큼 그리 맛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반미보다 양이 많지 않아서인지 간신히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호이안의 볼거리는 주로 올드 타운에 집중되어 있다. 호이안의 랜드마크라는 일본 상인들이 세웠다는 돌다리 내원교와 중국인들이 세운 사당과 그들이 살던 고가들이 주로 볼거리란다. 그리고 투본강을 끼고 양쪽에 늘어선 상점, 커피숍, 레스토랑 그리고 시장 등이 투어의 핵심 코스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지고 나서의 홍등 축제가 명물이라고 한다. 

한창 뜨거운 오후 세 시부터 돌아다닌 탓에 나는 지쳐 있었다. 지난밤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뒤척이다 두어 시간밖에 잠을 취하지 못했기에 피곤함이 더 했을지도 모른다. 오후 다섯 시, 홍등 축제가 시작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 우리는 피곤함을 씻어내기 위해 발 마시지를 받았다. 시간당 20만 동 한화로 1만 원이다. 냇물이 흐르는   길옆의 마사지숍에 앉아서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잠시 휴식이다.

   7시가 되자 어디에서들 왔는지 관광객이 몰리기 시작했다. 특히 투본 강가 양쪽의 가게들과 집들, 강가에 떠 있는 유람선에는 붉은 등이 내걸렸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단체여행객들이 한꺼번에 몰려 강변의 길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특히 중국인, 한국인 단체가 많았고 일본, 베트남의 단체관광객들도 보인다.

   홍등들은 어둑한 강변을 비추고 몇몇은 강물 위에 촛불을 켠 등들도 띄워 보내고 있다. 작은 유람선 주인이 다가와 싸게 해 줄 테니까 배를 타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양하고 등불과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강가를 잠시 걷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베트남 고시가지의 풍취였지 홍등이 아니었다. 호이안은 내가 기대했던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정경과 느낌에는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아마 몇 해 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국 리장(여강)의 고시가지에서 느꼈던 감흥을 기대했기에 실망했는지도 모른다.     

    

     6 박물관에서 만난 석상의 미소     


  호이안에서 그랩으로 택시를 호출하여 다낭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번의 숙소는 용교 건너편 고급 호텔과 리조트가 즐비한 미케 해변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호텔 주변은 한인들이 밀집해 사는 소위 한인타운이란다. 그래선지 삼겹살집, 연탄구이집, K마트, 미용실까지 한국식 간판이 곳곳에 보인다.

  오후 두 시에 체크인한 뒤, 후배들은 다낭에서 유명하다는 반미 집에 간다고 한다. 택시 타고 십여 분은 걸리는 거리다. 햇볕이 내리쬐는 대낮에 나선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나는 호텔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겠다고 하고 오랜만에 짬짜면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가격은 한국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다낭에서 먹는 짬뽕과 짜장면은 별미였다. 그러고 나서는 K마트에 들러 맥주와 견과류만 사 들고 돌아왔다.

   해가 지고 난 뒤 뒤늦게 우리는 베트남 쌀국수 체인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귀국 후 건강검진이 있어서 음주를 피하는  후배는 제외하고  생맥줏집에 들렀다. 아직 개업 준비 중이라는 사십 대 후반의 주인은 한국어가 유창했다. 십여 년 전에 한국에 있었노라고 했다. 그곳에서 후배와 함께 버드와이저와 호가든 생맥주를 주문해 마셨다. 둘이 일곱, 여덟 잔을 마신 것 같았는데 36만 동이란다. 우리 돈 1만 8천 원에 시원한 맥주파티로 일정을 맺음 했다.

   베트남에서 6일 차, 저녁에는 다낭 공항으로 가야 하는 날이다. 오늘 하루는 특별하게 일정을 짜 놓지는 않았다. 각 개인의 자유시간으로 일정을 보내기로 했다. 나는 강 건너 구시가지 근처에 있는 참조각박물관과 현지의 백화점과 마트 그리고 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일행 둘은 박물관까지 같이 갔다가 건강식품과 기념품을 구입하기 위해 롯데마트에 간다고 한다.

  뜨거운 대낮에 들른 참조각박물관은 인도네시아계 참족이 베트남 중부로 이주하면서 세운 참파 왕국의 신전에서 출토된 석조 유물들을 전시한 곳이다. 9세기~13세기 때의 다수의 석조유물이 전시된 내부는 에어컨 시설이 되어있지 않아서 무더웠다. 유물들은 대체로 힌두교의 성향을 띠고 있었고 간혹 불교적 색채가 가미된 전시물도 보였다.

    주로 시바와 브라마 비슈누 신들을 새긴 정교한 석상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또한 농경문화에서 유래된 성(性)에 대한 숭배가 힌두교와 습합 된 링가와 요니의 상징석들도 있었다. 또 다른 전시실로 들어서자 춤추는 무희 압사라의 요염하면서도 역동적인 모습의 조각 이외에도 인간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를 지닌 가루다 상, 원숭이들의 왕이라는 하누만 상 그리고 용을 형상화한 여럿 정교한 석상들이 놓여 있었다. 삶과 죽음의 세계,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꿈과 상상과 영원에 대한 믿음이 결합되어 있는 신상(神像)의 발아래에는 고통받는 초라한 인간의 군상들이 새겨져 있었다.  

   참조각박물관에 전시된 대다수의 석상은 힌두교에 뿌리를 둔 신이거나 전설적인 동물 혹은 존재들이다. 그들의 형상은 대다수가 인간의 모습이지만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상징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일부의 상들은 우악스러운 이빨과 뿔, 부리 등을 달고 있거나 인간 형상의 시바, 비슈누 같은 신들은 대체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러 유물을 돌아보던 중 나는 전시된 여러 유물과는 확연히 다른,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짓고 있는 반신상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신과 괴물들이 마치 그들만의 판을 벌이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의 전시실 한 귀퉁이에 놓인, 눈 감고 미소 짓는 석상이었다. 처음에는 ‘형상과 미소 때문에 여신상 아닐까? 머리 모양에 의해 부처나 보살상 아닐까?’하고 짐작했었다. 가까이 다가서 명패를 보았다. “Male Denity” 남신(男神)이란다. 남 신상이라고 하지만 어쩐지 여신상 같은 석상의 미소… 차가운 돌에 이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새긴 그는 누구일까? 그리고 그 미소의 의미는?

  신과 전설 속의 괴수들을 포함한 무수한 석상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미소 짓는 반신상(半身像). 그러나 어디에도 그 신상(神像)에 대한 해설도 설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남자 신의 형상이라고만 추정할 뿐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표정을 흔히 “오만가지 생각, 오만가지 상”으로 관습적으로 지칭한다. 그만큼 다양하다는 표현이다. 사단칠정을 나타내는 오만가지 상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표정은 아마 미소일 것이다. 한 송이 연꽃처럼 온화하게 피어나는 미소는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까지 번진다. 미소의 잔잔한 파동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분노와 욕심과 고통의 심정을 차분하게 가라앉게 한다. 나는 미소를 띤 석상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는 말없이도 내게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인천공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는 30분 연착하여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이륙했다. 여러 번 베트남에 왔었기에 특별히 산 기념품도 선물도 없었다. 그 흔한 커피나 녹차, 건강식품도 사지 않았다. 다만 시장에서 산 육천 원짜리 왕골 모자와 호이안 민속 악기점에서 산 큰아들에게 줄 대나무 피리가 전부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게 남은 것은 다낭의 강변, 후에 왕궁, 호이안의 구시가지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이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을 뜨거운 햇볕, 소금기의 바람, 커피와 향신료의 내음이다. 나는 그것을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행복해질 것이다. 그게 미소 짓는 신상이 내게 가르쳐 준 소중한 깨달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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