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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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황혼을 거의 매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것도 하루하루가 다른 모습으로 피어나는 다양한 색감과 형태의 노을을 본다면…
해와 바다, 하늘과 구름 그리고 바람과 파도가 만들어내는 빛과 소리의 향연, 나는 그 감동을 함께하기 위해 먼 거리를 날아왔고 달려왔다. 세계의 3대 노을이라는 코타키나발루에서 맞은 황혼의 아름다움은 나에게 많은 느낌과 생각을 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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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여행을 떠나자는 아내의 제안에 아이들은 겨울이니 따뜻한 곳으로 떠나자고 제안했고 모두의 동의 아래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로 가기도 했다. 나는 7박 8일 정도를 원했으나, 아내의 일정에 의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4박 5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모든 예약과 여행지는 둘째 아들과 딸이 맡기로 하였다. 이번 여행에서 아내와 나는 그저 여행비나 부담하고 따라다니면 그만인 격이다.
안성에서 새벽 3시에 출발하고 인천공항 장기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나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나니, 한 시간 반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이틀 전 발목을 접질려 걷기가 불편한 딸아이는 면세점에 들러 화장품 몇 개를 샀고, 아들은 별러오던 향수를 그리고 나는 담배를 산 뒤 국내 저가 항공사의 보잉 737기에 올랐다.
내가 출발할 때, 한국은 영하 6도의 날씨에 미세먼지가 심했다. 그리고 출발 당일은 폭설을 예보하고 있었다. 충분한 수면 없이 새벽 운전을 한 탓인지 머리가 맑지 못하고 어깨의 통증도 여전했다. 그저 잠이나 자려고 눈을 감았지만 쉽게 잠은 오지 않는다.
방학 동안 교재 개발, 기초학습 프로그램 제안서 작성, 시집 출간을 위한 편집에 몰두하다가 이제 개학을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떠난 여행. 교원연수도 빠지고, 몇몇 학과 일은 동료들에게 부탁하고 훌쩍 일상을 벗어난 시간, 겨우내 계속된 목디스크의 통증과 최근에 겪은 교통사고 후유증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 듦에 따라서 동반하는 무기력감과 우울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아울러 무엇보다 지는 해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황혼기에 접어든 나의 삶에 새로운 깨달음과 활력을 얻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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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간쯤 지나 도착한 코타키나발루 공항은 내가 수십 년 전 입대해서 근무하던 김포 국제공항의 규모였다. 한산하고 왠지 쓸쓸해 보이는 공항을 나서자 부드러운 공기가 우리를 맞이한다. 26~30쯤의 기온이라고 했지만 ‘덥다’라고 말하기보다는 그저 따뜻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은 날씨다. 다만 적도 근처라 햇볕은 따갑다. 직사광선만 피하면 습도도 높지 않아서 우리나라의 여름보다 훨씬 시원하고 쾌적하다.
아들은 그랩으로 택시를 불렀다. 금세 차는 도착했고 10분도 되지 않아 우리는 예약한 선셋씨뷰 콘도에 도착했다. 11층의 건물로 옥상에는 수영장이 있고 고층에서 보면 바다가 보이는, 상가와 아파트가 함께 있는 빌딩이었다. 우리가 예약한 아파트는 3층 11호 방 두 개와 화장실, 세탁실 그리고 넓은 응접실이 있지만 베란다는 없었다. 비교적 깨끗한 대략 30평쯤 되어 보이는 숙소는 하루에 우리 돈 10여만 원, 호텔과 비교하면 호화롭지는 않지만, 값도 저렴하고 또한 시내와 가까이 있어서 불편함은 없을 것 같았다.
잠깐의 휴식 후, 점심 겸 시내 구경을 하러 나섰다. 그런데 첫날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선 딸아이가 인터넷에서 검색해본 찻집으로 들어섰다. 곳곳에 한국인들이 보이는 그곳에서 특산물인 가야 잼을 바른 토스트를 곁들여 커피와 음료를 마셨다. 바싹 구운 토스트에 발라진 사과잼 비슷한 향기의 잼이 너무 맛있다고 딸아이는 즐거워했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졌다. 나는 산책이 불가능할 것 같으니 근처에서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아들이 구글에서 맛집을 검색하는 동안 나는 현지의 가게 주인에게 “국수 맛있는 데가 어디냐.”라고 영어로 물었다. 그런데 ‘누들’이란 단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내 발음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내가 다시 검지와 중지를 펴서 젓가락질을 하는 흉내를 내자, 현지인이 검지로 방향을 지시한다. 왼쪽으로 돌아가서 다시금 오른쪽으로 가라고 한다. 그리고 익숙지 않은 가게 이름을 두 번이나 말해준다.
현지인이 추천한 음식점에는 마침 테이블이 하나 비어 있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음식 4개를 메뉴판을 보고 주문했다. 잠시 후 테이블에 놓인 것은 맑은 국물의 닭국수, 걸쭉해 보이는 소고기 국수와 볶음면인 미고랭과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한국의 돌솥 밥처럼 토기에 담긴 볶음밥이었다. 앞접시를 달라고 해서 조금씩 덜어서 먹고 난 뒤 우리들의 반응은 똑같았다.
“다 맛있다.”
종업원이 ‘고수’에 관해 물었을 때, 아내가 듬뿍 넣으라고 말했다. 그런데 고수의 향도 심하지 않고, 여타 향신료의 냄새도 전혀 부담되지 않는다. 여러 번의 여행 때문인지 우리 가족 모두는 동남아 국가의 향신료나 소스에 거부감이 없다. 그래선지 네 그릇을 금세 비우고 일어섰다.
“얼마 나왔니?”
식대를 지불한 아들에게 물었다.
“한 그릇에 7~8링깃이니 다 합쳐 만 원 정도 되겠네요”
아들이 답했다. 고기가 든 국수 두 그릇과 볶음면, 볶음밥을 넷이 맛있게 먹은 대가가 일만 원이라는 것이 어쩌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다. 베트남에서 먹은 쌀국수가 대략 2천 원 안팎이었는데, 맛과 가격에서 베트남의 쌀국수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것 같은 첫 끼 식사였다. 한국에도 가격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맛있는 음식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저렴한 가격에 그런 음식을 맛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 가족들은 대체로 미식가들이다. 평소 검소한 아내도 맛있는 음식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가끔은 나만 빼고 아이들과 유명하다는 요리사가 있다는 곳, 맛집으로 이름난 음식점도 찾아가기도 한다. 나는 호화스러운 분위기의 음식점에서 비싼 요리를 먹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돈이 아깝기도 하지만, 그런 곳에는 편안함과 감동이 없다. 오히려 포장마차나 막걸릿집을 좋아한다. 누가 사도, 얻어먹더라도 부담이 없고, 평소 소식하는 내가 아깝다고 억지로 먹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외국 여행하면서 기억에 남는 음식도 길거리에서의 꼬치구이나 베트남 시장터의 껌땀처럼 소박하고 서민적인 것들이다. 그래선지 말레이시아의 첫 끼는 내게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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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는 11층짜리 건물 2개 동이 연결되어 있다. 중간에는 개방된 공간인 복도가 있고 가끔 투숙객들이 그곳에서 담배를 피운다. 서편으로는 건물이 들어서 있고 동편으로는 수상 가옥이 즐비하게 보인다. 마치 부와 빈곤이, 문명과 원시가 양쪽에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다. 틈이 날 때마다 나는 그곳에서 동편에 늘어선 수상 가옥을 주시하고는 했다. 낯설기도 했지만,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 깊지 않은, 마치 늪 같은 곳에 나무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집을 지은 수상 가옥들은 나무판자로 된 다리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녹슨 양철지붕과 판자로 이어진 엉성한 벽들은 위태로워 보였으며, 지저분한 주변은 그곳이 빈민가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가옥 아래에는 바닷물과 무분별하게 버려진 듯한 쓰레기들이 보였고 가끔 튀어 오르는 작은 고기들 그리고 사냥에 나선 듯한 백로 몇 마리가 무표정하게 서 있다. 양철 지붕 위에는 새들이 날고 있었고, 판자로 낸 물 위의 길에서는 아이들이 놀고 수탉과 고양이와 개들도 보였다. 수상 가옥이 끝나는 맞은편 언덕에는 둥근 지붕의 이슬람 모스크가 보이고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확성기를 통해 울려 나오고 있었다.
내가 처음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감정은 연민이었다. 전기는? 수도는? 태풍이 오면? 등등의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러나 며칠 동안 틈틈이 그들을 보는 동안 나의 관점은 오히려 바뀌었다. ‘부와 문명의 관점에서 재단하려는 내 생각이 과연 온당할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그들이 사는 수상 가옥의 위로는 미세먼지 없는 푸른 하늘이, 집 곁에는 맹그로브 숲과 나무들이 그리고 아래에는 비록 깨끗해 보이지는 않지만 바다가 있다. 사계절 내내 춥지 않은 기후, 개와 고양이, 닭과 새들… 집과 집은 나무판자 다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른 아침에는 호스로 공급되는 물을 받기 위해 쭉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아침 산책을 하면서 나는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구경삼아 힐끗거리는 것은 어쩌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엄연한 삶이고 일상이다.
누군가는 현대인들을 봉급 노예라고 표현했다. 자녀의 양육과 교육, 병원비와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매일 반복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묶여 산다. 우리가 사는 도시의 삶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각종 법규와 의무와 책임의 틀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어쩌면 자신을 속박하면서, 재촉하면서, 학대하면서 살아간다. 진정한 자유와 휴식이 없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일상의 틈새에서 서서히 마모되고 있다.
수상가옥의 사람들보다 더 가진 게 많다고, 문명의 이기를 더 누리고 있다고 우리가 더 행복하다고 우리의 삶이 더 낫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이미 잃어버린 밤하늘의 은하수, 자꾸만 아득해지는 푸른 하늘과 새들의 노래 그리고 그리운 맑고 깨끗한 공기와 바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아직 그들은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란 느낌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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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일어나 7시에 숙소 정문을 나섰다. 12인승의 승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현지 여행사에 예약한 투어가 진행된다.
여행사에서는 여러 투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만따나니 섬으로 갔다가 나나문의 강변에서 진행하는 반딧불 투어를 예약했다. 한국 여행사의 투어 프로그램을 보면 제시되는 가격이 저렴할 경우 이들은 옵션으로 제시되는데 그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두 개의 옵션을 모두 선택할 경우, 1인당 거의 20만 원이 넘는다. 아들은 여러 군데의 현지 여행사의 데스크를 방문하여 깎고 또 깎아서 1인당 5만 원이 채 안 되는 가격으로 예약해놓았었다.
시내에서 두 시간 정도를 달려서 도착한 곳은 바다와 닿아있는 강변이었다. 중국인 가족 3명과 러시아인 노부부가 우리와 동행했다. 그곳에서 다른 일행들과 함께 이십 명 정도가 고속보트를 타고 섬으로 향했다. 밋밋한 강물을 지나 바다에 들어서자 보트는 몸이 심하게 흔들릴 만큼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놀이기구를 탄 듯 출렁이면서 한 시간 만에 닿은 섬은 늘어선 야자수, 눈부신 흰모래와 맑고 깨끗한 푸른 파도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섬에 도착하자마자 아들과 나는 호핑 투어를 하기 위해 다시 바다로 나갔다. 아내와 딸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둘만 가기로 했다. 나는 현지에서 우리 돈 6천 원 정도를 주고 흔히 오리발이라고 부르는 핀을 두 개를 빌렸다.
호핑 투어 시간은 대략 1시간, 10여 분을 배를 타고 나가서 수심이 3~4m 정도의 산호초 지역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아뿔싸 여행사에서 대여해준 스노클링 장비가 제 기능을 못 한다. 숨을 쉴라치면 바닷물이 빨려 들어온다. 그런대로 바닷속을 주시하자 갖은 산호들과 돌돔, 자리돔, 파랑돔 그리고 이름 모를 고기떼들이 유유히 노닐고 있다. 아들은 신이 났는지 오리발로 여기저기를 헤엄치고 다닌다.
오후 1시 반이 지나서야 우리는 아침 겸 점심의 첫 끼를 해결했다. 밥 위에 치킨과 볶음국수, 양배추를 얹고 후식으로 수박을 먹었다. 배고픔이 최고의 반찬이었기에 그런대로 불만은 없었다.
연안의 옅은 색의 바다는 멀어질수록 짙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흰모래와 푸른 바다의 색감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그곳에서 휴식을 취한 뒤 다시금 배를 타고 나나문의 강변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다시금 배를 갈아탔다. 강변의 맹그로브 숲을 지나면서 그곳에서 서식하는 원숭이들을 보는 투어가 진행된다.
열대식물과 나무들로 가득한 밀림 사이로 흐르는 황톳빛 강물 위로 천천히 배가 나아갔다. 가끔 새들이 보이지만 원숭이 무리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명상하듯 1시간이 지나고 승합차에 올라 다시금 바닷가로 떠났다.
인근 농장에서의 저녁은 점심과 메뉴가 거의 같았다. 닭튀김과 카레에 끈기 없는 쌀밥이지만 가족 모두는 무난하게 식사를 마쳤다. 식사 후에는 아들과 딸은 해먹에서 아내와 나는 의자에서 모처럼의 휴식을 취하며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오후 6시가 넘자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는 해를 보기 위해 바닷가로 걸어갔다.
평소보다 커다란 햇덩이가 바닷속으로 천천히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서녘 하늘은 온통 붉게 물들고, 바닷물은 금빛으로 출렁인다. 마치 남은 에너지 모두를 뿜어내는 듯 이글거리는 태양을 주시할 수 있는 시간, 빛과 어둠이 교묘히 배합되면서 변화를 거듭하는 색감…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카메라를 들고 오지 않은 것이 잠시 후회가 되었다. 직접 대면하는 것과 사진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광경이었다. 칼새들이 나는 모습, 출렁이는 파도 소리와 순간순간 변하는 해변의 황혼을 사진으로는 담아낼 수 없음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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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가 가까워지자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타 여행객들과 함께 강변의 배에 다시 올랐다. 반딧불이 투어를 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척의 배들은 불을 끄고 어둑해진 강변을 따라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불빛은 끄고 투어 진행자가 손전등 하나만을 깜박이면서 맹그로브 나무숲으로 서서히 접근해 갔다.
반딧불이를 본 적이 언제이던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 가끔 숲으로 날아오는 한 두 마리의 반딧불이를 잡아서 놀다가 놓아주었던 기억이 전부다. 형설지공 螢雪之功이란 말을 가끔 선생님들이 하셔서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의 불빛에 글자가 보이는지 비추어본 기억도 있다.
긴소매의 셔츠에 바지를 입고 모기 기피제까지 미리 뿌렸지만, 보르네오의 모기들은 게릴라처럼 소리도 없이 다가와 손등 여러 군데를 모기가 물었다. 물린 환부는 가렵기보다는 화끈거리는 것이 마치 작지만 화끈하게 매운 동남아의 새 눈 고추를 연상시켰다.
10여 분쯤 배가 강변을 따라가자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이 몇 군데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는 반딧불이가 날아다닐 거라 상상했지만 거의 모두가 나무에 앉아 있었다. 몇 그루의 나무를 더 지나치자 한꺼번에 수십 마리 이상의 반딧불이가 서식하는 나무들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나무에서 반짝이는 무수한 반딧불이의 불빛, 열대에서 여름밤에 만나는 크리스마스트리였다.
손전등을 깜박이자 일순간 모든 반딧불이가 답하듯이 반짝반짝 불빛을 발했다. 어둠과 빛이 만들어내는 그들만의 언어였다. 아니 노래인지도 모른다. 소리가 아닌 빛으로 구애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새삼 경이롭다. 배 위에 있던 중국인, 한국인, 유럽인 모두가 그들의 불빛에 ‘아!’라고 경탄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배가 나무로 다가가자 몇 마리의 반딧불이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내 앞에 있던 예닐곱쯤 보이는 중국인 소녀에게 누군가 한 마리를 잡아 주었다. 그 소녀는 작은 손안에 있는 반딧불이의 반짝임을 우리에게도 보여주었다. 그녀에게는 아마 커서도 결코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그 소녀는 뒤에 앉은 큰언니 뻘 되는 딸을 원숭이 투어 때부터 자꾸만 쳐다보았었다. 아마 언니가 좋았나 보다. 그래서인지 반딧불이를 제일 먼저 딸에게 보여주었다. 딸은 중국인 소녀에게 몇 마디 중국어로 답했다.
“피아오량!”
7
셋째 날 블루모스크를 비롯한 몇몇 명소를 택시를 타고 다녀온 다음에는 관광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그래서 넷째 날은 가족 모두가 개인 일정으로 시간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11시쯤에 아침 겸 점심을 쇼핑몰의 음식점 부스에서 현지식으로 한 뒤, 저녁은 딸아이의 강력한 요구로 중국식당에서 훠궈를 먹기로 했다.
시내 쇼핑몰에서 아내와 아이들은 다시 숙소로 향했고 나는 혼자 산책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오를 넘기자 덥지는 않지만, 적도 부근의 햇빛은 매우 따갑다. 먼저 시의 랜드마크 중에 하나인 벽화가 있는 쇼핑몰 근처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있었다.
히잡을 둘러쓴 두 여성이 내 옆에서 그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둘 중 젊은 여성이 한 손으로 힘들게 셀프 사진을 찍으려는 모습을 보고 “내가 사진을 찍어드릴까요?”라고 나는 영어로 말했다. 그러자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딸로 여겨지는 여성이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검은색이 아닌 것으로 봐서 현지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미소와 작은 손짓으로 정중히 사양했다. 그리고는 잠시 후, 그랩 택시가 서자 그녀는 뒤를 돌아 나를 보고 머리를 잠깐 숙여 인사를 하고 택시를 탔다. 소소한 작은 배려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에 오히려 내가 당황한 순간이었다. 그녀가 제안을 거절할 때, 나는 낯선 인물에 대한 거부감 혹은 휴대전화를 도난당할까 봐 그런 것인가? 혼자 상상했었다. 그녀의 목인사는 그런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코타키나발루는 바닷가를 끼고 도시가 자리하고 있다. 쇼핑몰과 호텔, 시장 등도 바닷가와 연해 있다. 산책하면서 바다와 도시를 함께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대낮에는 현지인들은 거의 다니지 않는다. 가끔 단체 관광을 온 한국인들만 몇 팀 보았을 뿐이다. 낮이라서 시장도 아직 열리지 않았다. 쭉 도시를 걷다가 더위를 식힐 겸 나는 우리의 백화점 비슷한 쇼핑몰에서 음료도 마시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버거도 사고 말레이시아풍의 리넨 셔츠도 기념품을 대신하여 한 벌 샀다. 흔히들 여행은 보는 즐거움, 먹은 즐거움, 사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나는 이 즐거움 셋을 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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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에 겪은 교통사고의 후유증, 목디스크에 의해서 지속되었던 통증과 이명 증상을 5일 동안 나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낯선 도시와 사람들, 맑고 깨끗한 하늘과 바다 그리고 신선한 바람이 일상 속 우울의 색감을 지워버리고 통증을 날려 보냈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선택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우리를 얽매고 억압하고 압박하는 현실의 굴레를 당연하다고 여기고 어쨌든 감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 생각밖에 또 다른 세상과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아 이곳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아 이렇게도 사는구나!’, ‘아 이런 것도 있구나!’ 이런 발견과 인식은 일상의 우리에게 활력이 되고, 견디는 힘이 되고, 새로운 희망이 된다.
나는 코타키나발루의 명소를 절반도 못 보고 왔다. 아니 몇 군데 더 갈 수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여유가 있는 일정을 원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좋은 사람들과 다시 함께 그곳을 여행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에필로그
코타키나발루를 다녀온 이후 한 편의 시를 썼다.
2019년 모 시 전문지에 발표를 했다. 좋은 시는 아니지만 소개한다.
물 위의 집
녹슨 양철 지붕 아래 사람들이 산다.
아이들이 논다.
집 아래는 바다, 그 속에서 물고기들이 논다.
나무판자의 길에서 고양이와 수탉이 운다.
지붕 위는 푸른 하늘, 하늘에는 구름이 간다.
먼 육지의 언덕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
엎드린 흰 파도가 온다.
수상 가옥 옆에는 맹그로브 숲
숲 위에는 백로들이 둥지를 짓는다.
저녁놀이 번지면 칼새들이 춤을 춘다.
반딧불이가 반짝 말을 건넨다.
멀리, 나의 삶 밖에 있는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