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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시인 Jan 08. 2020

자유 여행의 명과 암

                 -호찌민, 달랏을 다녀와서

      1

    항공권과 호텔만 예약하고 구체적인 일정을 정하지 않고 떠난 여정, 이른바 자유 여행은 일상과 구속에서 탈출하는 해방의 자유와 함께 위험과 불안이 함께 한다. 미리 정해놓지 않았기에 불안정함이 일정 내내 동반하는 것이다. 그러한 불확정성 속에는 명과 암, 행운과 불행, 기쁨과 고통이 함께 한다.     

   

    2

    한국에서는 열대야가 매일매일 거듭되던 8월 중순, 아내와 지인 부부와 함께 다시 베트남으로 떠났다. 예전에는 사이공으로 불리던 호찌민 시내에 있는 아파트 숙소를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떠난 여행이었다.

    한국에서는 연이어 섭씨 30여 도를 넘는 무더위가 지속되고 있었지만 호찌민은 오히려 20도 중후반의 그리 뜨겁지 않은 날이었으며 아침저녁이면 선선함을 느낄 수도 있었다. 물론 가끔 지나가는 스콜의 빗줄기가 우리의 발걸음을 막을 때도 있었으나, 그것도 찻집에서 잠깐 기다리면 금세 그친다. 

    호찌민이 세 번째 방문이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여행객의 리더가 되었다. 반 바지와 셔츠에 작은 배낭을 메고  일행들과 첫 일정을 시작했다. 프랑스 식민시절에 건축된 시내의 노트르담 성당과 호찌민 우체국, 책 가게가 즐비한 거리, 하이랜드 커피숍을 거쳐 우리는 쌀 국숫집에서 점심을 먹고 벤탄 시장을 둘러보았다.

프랑스 식민시절에 지어진 호찌민 우체국

    현지인들과 여행객들로 언제나 붐비는 벤탄 시장에서 특별히 쇼핑할 것은 없었지만 망고주스를 마실 겸 발걸음은 쌀 국숫집 앞의 시장으로 향했다. 나는 일행들에게 휴대폰과 지갑을 주의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가죽제품, 시계, 신발, 의류, 장신구, 기념품 등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연이어 늘어서 있고, 한둘이 간신히 지날 수 있는 통로에는 현지인뿐만 아니라 여행객들로 가득했다. 

    나는 뜨거운 날씨에 쓸만한 모자를 잠깐 구경하느라 가게들이 늘어선 통로에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내 옆에 서 있는 점원인듯한 2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에게 상품을 보여달라고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녀는 나를 보더니 무작정 달아나기 시작했다. 의아했지만 그녀가 취한 행동의 이유를 잠시 뒤에 알 수 있었다. 내가 메고 있던 작은 배낭의 지퍼가 열려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여권과 지갑은 깊숙이 간수되어 있어 잃어버리지 않았으나, 배낭 겉의 주머니에 든 휴대폰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뿔싸 카메라도 별도로 가져오지 않았는데… 백업하지 못한 자료들도 많은데…

   여행의 살림을 도맡은, 금융권에 근무하는 동행한 후배가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에 여행자보험에 들었다. 현지에서 물품을 분실한 경우, 현지 경찰서에서 분실 증명서를 받아 보험사에 제출하면 보상이 가능하다고 한다.  시장 근처의 경찰 파출소를 찾았다. 영어가 능통하지 못한 현지 경찰에게 휴대폰을 도둑맞았노라 이야기했다. 그러나 경찰은 자기가 영어를 모르니 ‘통역을 데리고 오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하는데 통역이 어디 있냐.’는 나의 항변에 ‘호텔 지배인을 오라고 해라.’, ‘CCTV를 확인해야 한다.’,‘현장 검증을 해야 한다.’ 등으로 번거롭게 만들었다. 또한 ‘당신이 잃어버리고 도둑맞은 거라고 하는지 어떻게 아냐?’고 말하면서 그냥 포기할 것을 종용했다. 고압적인 경관의 태도로 보면 순순히 분실 증명서를 떼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일본인 남자가 자신의 호텔 지배인과 함께 와서 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 순간 일종의 오기가 솟구쳤다. 되건 안되건 부딪쳐 보자는 생각으로 경관에게 항변했다. ‘나는 선생이다. 그리고 잃어버리고 도둑맞았노라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인데 이런 방식으로 여행자를 대하면 안 된다.’ 등등의 항변에 그는 그럼 현장 검증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비교적 세찬 줄기의 비가 내리는 와중에 경찰과  다시 벤탄 시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주스 가게의 주인과 녹차 가게 점원의 증언으로 내가 시장을 들렀다는 것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분실 증명서는 여행자의 신원, 숙소, 분실 장소, 품목 등을 영어로 기재해야 하며 분실 경위를 상세히 영어로 기술하도록 만든 양식이었다. 능통하지 않은 영어지만 나는 누구이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를 기술했다. 오랜만에 영작문 시험을 치른 기분이었다. 그런데 서류를 검토하던 경관은 한 단어를 문제로 삼았다. 내가 기술한 stolen(도둑맞다)를 lost(잃다)로 바꾸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끝까지 자국인을 도둑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그의 맹목적인 애국심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정액으로 칠한 부분에 lost라 적어 주었다. 공문서를 수정액을 사용해 고친다는 것도 그렇고 분실 경위를 적은 마지막 문장에 stolen 이란 단어가 또 나오는데 그 부분은 모르는 것도 그렇고… 현지 경찰의 어눌한 모습에 오히려 친근함이 느껴졌다.     

시내 외곽에서 

     

     3

    첫날부터 스마트폰을 도둑맞고 시작된 여행,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보험용 분실 확인서를 발급받았지만 눈과 귀가 묶인 느낌, 유쾌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주눅 들어 있으면 모처럼의 즐거운 분위기를 깰 수 있으리란 염려 때문에 내색할 수 없었다. ‘어차피 불행도 행운처럼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 ‘왜 그런 일이…라고 생각하고 잘못을 되새겨보아 별다른 소득도 없다.’ ‘그저 겪은 값진 경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불쾌한 감정을 다스리고자 했다. 

    

  - 호찌민에서 출발한 침대 버스에서 일곱 시간. 

   낯선 경치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황톳빛 사이공 강가 옆으로 늘어선 야자수, 평지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숲, 간헐적으로 보이는 고무나무 농장들 그리고 길옆의 작은 마을들에 이르기까지… 베트남도 한국처럼 오랜 기간 전쟁을 겪었다. 밀림으로 숨어든 게릴라인 베트콩들을 색출하기 위해 그 많은 숲을 초토화시켰었다. 그러나 이제는 푸름을 완전히 되찾은 듯했다. 

    한참을 달린 뒤 고산지대로 버스가 접어든다. 산맥을 몇 개 넘고 나서야 해발 1,500미터에 자리한 달랏에 닿을 수 있었다. 달랏은 연평균 기온 18도의 사계절이 선선한 곳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개발된 휴양지로, 호수를 끼고 있는 시내 주변에는 곳곳마다 계곡과 폭포가 있고 커피와 꽃 그리고 신선한 채소가 특산물이라고 한다. 베트남 젊은이들에게는 선망의 지역이지만 아직 한국인들에게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숙소에서 바라본 달랏 시내

    우리는 시내 한가운데 호텔을 하루 50만 동(한화 2만 5천 원)에 예약했었다. 실지로 접한 호텔은 깨끗한 편이었지만 방은 약간 좁게 느껴졌다. 하기야 호찌민에서 기거했던 아파트는 방이 셋에다 거실도 널찍한 한국의 30여 평의 아파트와 같았으니까 좁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틀 동안 접한 베트남식 아침 식사는 정갈했고 김치까지 차려 주었다.

  비가 간간이 내리는 중에도 우리는 호숫가와 찻집, 해산물 식당 등에서 재미와 여유를 만끽하곤 했다. 달랏은 사계절이 꽃이 피어나는 꽃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곳곳에 심어진 꽃들, 꽃나무들, 풍부한 과일과 커피는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우리는 이튿날 현지 여행사에 1인당 20만 동(1만 원) 정도의 경비를 내고 인근 명소 관광에 나섰다.

호숫가 옆 공원에서

   12인승 버스에 동행한 여행자는 우리 일행을 포함 태국에서 왔다는 4명의 가족들, 말레이시아에서 온 부부까지 모두 10명이었다. 가이드는 우리를 왕실 별장, 인근의 절, 폭포 그리고 꽃으로 꾸며진 공원 등으로 안내했다. 비가 온 탓에 아침 날씨는 선선하다 못해 추웠다. 나는 긴 팔의 방수 점퍼를 입고 있었으나 현지에서 스웨터를 사서 껴입었다. 아내도 따스해 보이는 외투를 하나를 구입했다.

  첫날 저녁은 해산물로 파티를 벌인 우리는 베트남 전통의 음식을 먹기 위해 현지 식당을 찾았다. 음식은 그저 그런대로 먹을 만했지만 현지 특산 주라는 발효한 쌀을 증류시켜 만든 보드카 비슷한 넵머이를 원래 가격보다 서너 배나 더 많이 받는다. 15만 동이면 살 수 있는 데 60만 동이나 내란다. 따지고 항변할까 하다가 이번에는 그냥 참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천 원짜리 소주를 음식점에서는 사천 원, 오천 원씩이나 하니까 말이다.        

     

     4 

   달랏에서 셋째 날, 우리는 현지 여행사 프로그램 대신 우리끼리 인근의 랑비엔 산에 가기로 했다. 호텔에서 불러준 택시를 타고 즐겁게 출발한 하루, 현지에 도착해서 12만 동의 택시비를 후배는 120만 동씩이나 지불하는 실수를 했다. 나는 곧바로 잘못되었음을 지적했다. 후배는 곧바로 기사에게 항변을 하였고, 모르는 체하며 돈을 받았던 택시기사는 순순히 돈을 되돌려주었다. 한국 여행객들이 환율 차이를 착각하여 종종 벌어지는 실수다. 

    지프를 타고 오른 랑비엔 산의 정상은 비안개에 가려 있었다. 우리와는 인연이 없는 듯 자욱한 안개만 보여주고 달랏 시내의 정경은 보이지 않았다. 커피로 씁쓸함을 달래고 하산했지만 택시기사는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마 양심의 가책 때문에 민망해서 우리를 다시 볼 수 없었기 때문일까?  

    랑비엔 산 아래의 휴게소에는 비 때문이지 여행객이 드물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택시는 오지 않고 비만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휴게소 처마에서 빗소리만 처량하게 듣는 신세가 된 우리에게 한국인듯한 40대 여성이 말을 걸었다.

랑비엔 산에는 비안개만 가득

    “혹 한국인이세요?”

   그녀는 택시를 넋 놓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을 간파하고서는 자신이 타고 온 택시를 같이 타고 가자고 했다. 그녀와 그녀의 딸 그리고 우리 4명에다 기사까지 작은 택시에 일곱이나 타고서 달랏으로 무사 귀환했다. 그녀는 딸과 함께 분당에서 왔다고 했다. 우리는 극구 사양하는 두 모녀에게 고마움에 답하는 의미로 숯에 구운 고기와 국수를 함께 먹는 베트남의 전통 요리인 분짜로 점심을 대접했다. 그리고 뜻밖의 곤경에서 만난 행운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저녁 산책을 나갔다가 한국 음식점을 보게 되었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실내장식이 깔끔했고 한국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베트남의 젊은 남녀들만 가득한 그곳에서 우리는 오랜만에 돼지갈비와 로스구이를 맛있게 먹었다. 지배인에게 물어보니 음식점 사장은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에서 오래 있었던 현지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잠시 후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사장이 새로 개발한 메뉴라며 우리의 파전과 비슷한 요리를 서비스로 내어왔다. 맛이 어떠냐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맛있다고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고기 소스도 된장이나 고추장을 이용해서 만들면 더 한국 음식에 가까울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반응에 그녀도 유쾌했고 우리도 값싸게 한국 음식과 소주를 즐긴 것에 만족했다.  

한국음식을 파는 달랏의 음식점

    달랏에서 나는 기념품 대신 녹차와 재스민차를 구입했다. 한국과 비교하면 아주 싼 가격이었고 최상급은 아니지만 맛은 괜찮았다. 아마 1년 이상은 연구실에 두고 틈틈이 마실 수 있는 분량이다. 달랏에서 3일을 보낸 우리는 다시 침대 버스를 타고 호찌민으로 돌아왔다.      

      

      5

    우리가 정한 숙소는 시내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 산책 삼아 시내를 돌아보다가 여독을 풀기 위해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시내에 위치한 마사지 숍에서는 전신마시지를 1인당 20만 동씩 받고 있었다. 그러나 마사지가 끝나자 그들은 과도한 팁을 요구했다. 나는 2불 이상은 줄 수 없노라고 단호하게 항변했다. 그들은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내 제안을 순순하게 수용했다. 급격히 자본화되어 가는 호찌민의 관광문화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우리는 벤탄 시장 근처의 푸드마켓에 들렀다. 베트남, 태국, 중국, 인도, 일본, 한국 음식의 부스가 마련된 마켓에는 대부분 유럽인 관광객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닭구이와 김밥과 라면을 먹었다. 한국 음식 부스의 사장과도 기분 좋게 인사한 뒤 우리는 초저녁부터 잠에 빠져들었다. 여행과 늘 함께하는 피곤함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호찌민에서 마지막 날, 우리는 숙소와 가까운 전쟁기념관을 관람하기로 했다. 간헐적으로 내리는 비를 피해 닿아간 기념관은 4층으로 되어있었다. 기념관 뜰 앞에는 베트남 전쟁 때 사용된 미공군기, 탱크, 야포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1층에는 각종 무기류 들이 그리고 2층에는 전쟁 당시의 참혹함을 증거 하는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전시 동선을 따라 지나다 나의 눈길이 멈춘 곳은 고엽제의 참혹함을 알리는 부스였다. 고엽제 살포 이후 초토화된 밀림, 피해자들의 처참한 모습들 그리고 고엽제에 의해 유전적 변이로 태어난 갖가지 모습의 기형아들… 한때는 사산된 갓난아이들의 표본이 전시되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너무 참혹해서 지금은 사진으로만 전시한다고 했다. 사진 기록에서 만난 기형의 아이들은 그저 팔이나 다리가 뒤틀린 정도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상상할 수 없는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 끔찍했다. 그곳에서 나는 40대 초반 정도의 여성과 마주쳤다. 눈과 머리가 검은 유럽계 여성이었다. 그녀는 홀로 울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So cruel!”(너무 참혹해요!) 그녀의 말이 가슴에 시린 화살처럼 꽂히고 있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함을 나도 실감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일종의 연대적인 죄책감을 느꼈다. 한국도 베트남 전쟁에 관해서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나는 아는 세대이다. 

   피해를 알리는 전시관 옆에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벌인 노력과 성과가 전시되고 있었다. 전 세계의 저널들, 국제적인 구호 및 환경단체의 활동이 소개되고 있었으며 한쪽에는 고엽제와 전쟁 피해를 입은 장애우를 위한 모금함이 놓여있었다. 나는 얼마 되지 않지만 가지고 있던 베트남 화폐 모두를 함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 1층에서 기념으로 파는 피해자들이 만든 듯한 털실로 만든 강아지 인형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6달러를 주고 샀다. 아내는 인형을 사는 내가 의아했는지 왜 사느냐고 물어본다. 나는 그저 기념품이라고 답했다.     

     

     6

    우리의 오전 일정이었던 전쟁기념관 관람은 나에게 여행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그저 이곳저곳에서 재미와 즐거움만을 추구하며 다닌 것은 아닌가?’하는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깨달음과 감동이 아닐까? 하는 또 다른 관점에 접어들게 이끌고 있었다. 

    점심에 우리는 돼지고기를 밥 위에 얹은 우리 돈 2천 원 정도의 껌땀을 먹었다. 고수를 좋아하는 나는 야채와 소스를 더 달라고 해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평소 소식하는 내가 독특한 향기의 채소들을 탐식하는 모습이 낯설었는지 아내는 자꾸만 웃는다. 

    우리의 오후의 일정은 호찌민시 박물관과 호찌민 박물관 관람이다. 시 박물관은 시의 연혁과 변화를 호찌민 박물관은 국부로 불리는 호찌민의 일생을 전시의 주제로 하고 있다. 이 두 곳은 관람객이 적어 한산했다. 특히 호찌민 박물관은 베트남 학생들만이 관람하고 있을 뿐 외국인은 우리가 유일했던 것 같다. 호찌민이란 베트남 영웅의 일대기 특히 독립투쟁에 대한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외국인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전시관을 둘러보고 사이공 강변을 따라서 걸었다. 강변에서 낚시하는 현지인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벤치에 앉아서 경치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하던 짬에 유람선 관광을 나서기로 했다. 보트라기보다는 작은 어선과 비슷한 배를 50만 동(2만 5천 원)에 빌리기로 한 것이다. 배는 한 시간 동안 사이공 강가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호찌민시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날씨도 개어서 푸른 하늘과 맑은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우리는 뱃전에서 강바람을 맞으면서 사진도 찍고 색다른 정경을 즐겼다. 넓은 강가를 따라 내려가자 근해에서 올라온 듯한 화물선들이 정박해 있고 작은 강줄기 곁에는 수상가옥들도 늘어서 있었다. 위태롭게 물 위에 얹힌 수상가옥은 지붕이나 벽이나 온전한 데가 없었다. 마치 쓰레기처럼 널려 있는 가옥들 지붕 건너에는 새 아파트들이 건설되고 있었고 그 너머에는 수십 층의 빌딩들이 들어서 있었다.     

사이공 강에서 바라본 정경

 

     7

    잔잔한 강물을 헤치고 배가 나아가는 동안, 나는 잠시 7일간 지속되었던 여행을 반추할 수 있었다. 낯선 곳, 사물, 사람들과의 우연한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지인과의 이별… 일상을 떠나 닿아온 베트남이란 타국,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마치 물결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자본화가 진행되는 베트남. 그들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빈부격차, 공해, 도농격차, 범죄, 산업재해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그들도 급격하게 산업화, 자본화의 길을 걸은 한국과 유사한 길을 걸어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산업화의 선진화의 급진적인 흐름이 그들의 순진한 마음씨, 순수한 웃음,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표정을 앗아갈는지도 모른다. 베트남을 잘 알고 있는 지인이 내게 “베트남은 올 때마다 변하고 있어요. 아마 몇 년 지나면 저도 생소할 거예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몇 년 뒤 다시 호찌민을 찾으면 지금의 모습이 오히려 그리워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배가 이윽고 황톳빛 강물을 헤치고 계류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뱃전으로 나갔다.

    엊그제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강 회장님의 타계 소식. 몸살림운동을 통해 알게 된 강 회장님은 나와는 10년 터울의 손위 형님뻘이었다. 동호회 회장으로 열심이었던 그분과는 평소 격 없이 지냈었다. 전화하면 “단장님 서울 한번 와라, 술 한잔 해야지요!” 걸걸한 경상도 사투리의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 귀국하는 날이 발인이라 조문도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나는 사이공의 넓은 강을 뒤돌아 바라보며 혼자 되뇌었다. “강 형 잘 가요!” 강변을 다니는 동안 줄곧 몇 마디의 말들이 가슴에서 서걱대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결합해 시구절들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내 뜰에 꽃이 지면

세상 어디에선가, 너의 정원에서 숲에서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내가 지금 이곳을 떠나며 이별할 때

너는 저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

피면 지는 것이 꽃이고 

만나면 이별하는 것이 순리인 것을,

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은

피고 지고 피고 지고

무수하게 헤어지고 만나는 것임을

슬픔은 무엇이고 

또한 기뻐함이 무슨 의미인가.

홀로 빗소리에 잠들다 

바람 따라 떠나는 길목에서.

                        -拙詩 「달랏을 떠나며」 전문     

 

강변에서

     8. 에필로그-페이스북에서     

    우리 사는 것 여행과 무엇이 다른가?

무수한 헤어짐과 만남, 밝음과 어두움, 즐거움과 고통… 그러나 이제는 고개를 끄덕일 나이인데 어쩌랴. 내가 이별과 만남의 의미를 구상하는 동안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세상을 하직했다는 소식, 귀국하기 전 발인이라니 작별의 의례도 치르지 못하는 슬픔…

    사이공 강변을 관광하면서 만나는 호찌민의 명암, 슬레이트로 간신히 비바람을 막고 사는 빈민들, 수상가옥 지붕 위로 치솟아 오르는 빌딩들, 전쟁기념관에서 목도한 고엽제의 기형아, 폭격으로 초토화된 도시들, 그 사진 앞에서 눈물 흘리던 낯선 유럽 여인… 즐거움과 향락만을 기대한 나에게 반성과 사유를 준 것에 고마워하며 돌아갑니다. 

-호찌민에서 출발하기 30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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