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시인 Jan 08. 2020

일엽편주(一葉片舟)처럼 떠난 베트남 북부. 1

- 하노이, 하롱베이, 사파, 닌빈 자유 여행기

1. 낯선 사물사람과의 만남을

          - 출발하며     

    12월 중순임에도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오전 7시 30분 날이 밝을 때가 지난 것도 같은데 비 때문인지 어스름이 걷히지 않는다.

    공항고속도로로 접어들었는데도 바다가 보이지 않아 차창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문질러 본다.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저것이 바다일 것이다. 비안개를 뚫고 쏘아지는 화물선의 불빛…

10시 하노이행 아시아나 항공, 온라인의 티켓 발매까지 해놓았으니 수화물인 가방 하나만 부치면 출국장이다.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인천공항의 불빛이 멀리서 보인다. 아직 본격적인 성수기가 아니어선지 출국장은 비교적 한산하다. 유리창 너머 하노이로 떠날 여객기가 대기하고 있다. 나는 면세점에서 담배만 달랑 사서 가방에 넣고 탑승을 기다린다.

    올 7월 이후 5개월 만에 다시 가는 베트남, 한국과 가깝고 음식도 입맛에 맞으며 치안도 비교적 안전하기에 시작되었던 여행이 이 번째가 벌써 다섯 번째이다. 늘 동행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홀로 떠나는 일정이다. 나의 선택이 어떠한 즐거움과 경이로움 그리고 힘듦을 가져올지는 나도 모른다.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 말고도 여러 변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 여행이기 때문이다. 때론 힘들고 어렵더라도 늘 웃는 모습으로 나는 낯선 사물들, 사람과 만날 것이다. 그것이 이번 여행의 유일한 마음가짐이다.     


    2. 흐린 강물 흐린 하늘

          - 베트남 북부 하노이에서 첫날     

  아시아나 에어버스 330 여객기는 오후 2시 무렵에 하노이에 내렸다. 한국은 오후 4시다. 떠나올 때 겨울비가 내리던 출발지와는 달리 이곳은 흐려 있다. 온도는 20도 초반으로 한국의 9월 날씨 같다.

    환전하고 유심칩 바꾸고 난 뒤, 마일린 택시를 타고 하노이 구시가지에 자리하고 있는 하노이 호텔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바라본 하노이의 하늘은 한국과 다름없이 뿌옇다. 미세먼지인지 스모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나다 본 강물의 색감도 흐리다. 급격하게 산업화가 진행되는 베트남 북부의 하노이, 어쩌면 우리의 대도시를 닮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성 요셉 성당 앞의 트리

  택시는 대략 50분을 달려 성 요셉 성당 근처에 내려주었다. 호텔은 골목 안에 자리 잡고 있기에 택시가 들어가지 못한다. 420만 동 한화로 2만 1천 원 정도다. 나는 그에게 500만 동을 주었다. 200만 2장, 100만 1장… 생각지도 못했는데 눈이 소처럼 순하게 생긴 젊은 기사는 나에게 100만 동은 다시 돌려준다. 20만 동(약 1000원)은 깎아주겠다는 것이다. 베트남을 여러 번 여행하면서 택시비를 스스로 깎아준 경우는 처음이다.

    여행자로 붐비는 구시가지 거리는 좁은 골목과 골목으로 이어진 무언가 정돈되지 못한 부산한 거리다. 인근에 호안끼엠 호수를 끼고 있고, 하노이의 마트들, 성 요셉 성당과 몇몇 관광지가 인접해있다. 거리 곳곳은 호텔, 현지 여행사, 음식점,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다. 한국인보다는 오히려 유럽인들이 자주 눈에 띈다.

    호텔은 예상한 것처럼 그저 그런 2성급 정도의 환경이다. 그런데도 사파나 닌빈보다 비싼 것은 아마 자리 탓일 것이다. 체크인 후 호텔 여직원이 현지에서의 일정을 묻는다. 내일이나 모레 하롱베이 일일 투어를 계획한다고 했더니 내게 자기들 프로그램을 권한다. 79달러 한화로 8만 원이 넘는다. 6시간 하롱베이에서 관광하면서 점심, 수영, 보트 투어가 포함된 가격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미 나는 현지 여행사에 들러 문의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38달러를 제시했었다. 호텔 여직원은 그곳과는 품격이 다르고 서비스가 다르다고 하지만 비싸다고 하롱베이의 풍경이 달라질 것은 아니고, 다를 것 별로 없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여장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오후 5시가 되어 인근 성 요셉 성당을 갔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서인지 색색의 전구가 성당 인근을 밝히고 있다. 커다랗게 크리스마스트리도 만들어 놓았다. 더운 지방에서 성탄절이라니, 그런데도 오히려 한국보다는 더 분위기가 고조되어있는 것도 같다. 한국의 경우 성탄절은 이제 신자들만의 행사가 된 것 같으니까.

    프랑스풍으로 건설된 성당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여행사 직원이 추천해준 현지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분짜를 잘한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밥이 든든할 것 같아, 볶음밥과 모닝글로리와 타이거 맥주를 곁들였다. 맥주를 마시자 피로 때문인지 몸이 노곤하다.  내일은 오전 8시 40분 픽업으로 시작하여 오후 9시 무렵까지 하롱베이 투어다.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들른 현지 민트 카페, 손님은 나 혼자다. 잘생긴 종업원 총각에게 왜 손님이 없냐고 물어보니 빙그레 웃는다. 잠들기 위해서 코코넛 커피보다는 망고주스가 나을 것 같아서 주스 한 잔 주문한다.

    아직 아홉 시 물론 한국시간으로는 11시이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호텔 근처의 맥줏집에 들렀다. 손님은 그리 많지 않다. 유럽인들 몇몇이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거나, 물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크래프트 비어(수제 맥주)를 한 잔 시켰다. 

맥줏집 주인은 유튜브를 통해서 음악을 틀어주고 있다. 그는 나에게 코리아 노래를 클릭하라고 한다. 나는 주저하다가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와 산타 에스메랄다의 ‘Don’t Let Me Be Understood’를 검색하여 클릭한다. 젊은 시절 좋아하던 수십 년 전의 노래를 낯선 곳에서 듣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두 곡은 10여 분 이상 계속된다. 산타 에스메랄다의 노래가 거의 10분이 넘기기 때문이다. 

   현악기와 금관악기가 조화를 이루며 리듬을 타는 동안 나는 맥주를 다 비웠다. 이제 딱 한 잔만 더, 그러나 수제 맥주는 맛이 쓰다. 나는 버드와이저 한 병을 시켰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벽 한 귀퉁이에 스마일 가스(Smile Gas)도 있다고 붙여놓았다. ‘굳이 가스까지 마시며 웃어야 하는 인생일까?’ 의아해진다. 취하지는 않았지만, 낮의 피로 때문인지 몸이 풀린다. 술집과 거의 붙어있는 호텔로 귀가한다. 이제는 잠이다.

    

 3. 하롱베이에서 절경에 취해

          - 2일 차 현지 투어를 떠나다.          


    ○ 한배를 탄 지구인들     

    아직 오전 8시도 안 되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라잇 나우!” 호텔 프런트에서 곧바로 내려오란다. 픽업하러 왔단다.

  어제 현지 여행사에서는 8시 45분쯤 호텔로 픽업하러 올 거라고 했는데 한 시간 빨리 왔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 새 나라의 늙은이(?)라서 다행이다. 6시에 눈이 떠진 후 7시에 아침 식사를 했다. 작은 호텔의 식사라서 꼭 기대만큼의 음식이다. 볶음밥, 육가공품 서너 가지 그리고 과일들… 소고기 쌀국수를 시켜서 같이 먹었다. 먹다 보니 그래도 맛은 좋다. 빵, 밥, 국수, 과일까지 평소 아침을 먹지 않는 나에게는 열량 과다일 것이다. 어차피 오늘 소비할 열량도 많은데 어쩌랴.

호텔의 평범한 아침 메뉴

  호텔 앞에는 오토바이를 탄 젊은 청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호텔이 골목 막다른 곳에 있기에 차는 들어올 수 없으니 당연하다. 수십 년 만에 배낭을 메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는다. 청년은 좁은 골목을 벗어나 도로로 질주한다. 이른 아침 같은데 차와 오토바이가 뒤섞인 하노이의 아침이다. 오토바이 좌석을 잡은 팔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베트남 사람들은 저리도 편하게 뒷좌석에 실려 가는데 나만 도살장 가는 소의 형국이다. 수십 년 전의 유연한 몸이 아니기 때문일까?

  젊은 청년은 나에게 말을 건넨다. 한국 사람이라고 했더니, 대뜸 박항서다. 나는 한국에서 베트남 축구 중계를 봤노라고 했다. 그리고 예의상, 베트남 축구가 많이 향상되었다고 했다.  십 여분을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여 그는 나를 투어 객들이 집결하는 장소에 내려주었다. 나는 팁으로 1달러를 내밀었다. 그는 순간 손사래를 쳤다. 아직 순진한 청년이다. 베트남인 특유의 부끄러움과 겸양이 느껴진다. 나는 다시 팁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꾸벅 큰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출발지는 현지 여행사 가게였다. 이미 유럽인들로 보이는 몇몇이 대기하고 있다. 그곳에서 30분을 기다렸다. 말끔하게 생긴,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드러나는 젊은 청년이 ‘서 팔로우 미’라고 말한다. 나는 그에게 ‘유어 핸섬 보이’라고 칭찬해주었다. 투어를 신청한 관광객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관광버스 한 대, 소형버스 한 대가 그들을 태우고 갔다. 잠시 후 24인승의 소형버스가 정차하자 가이드는 나에게 타라고 한다.

  우리 일행은 모두 20명, 가이드의 여행객 리스트를 보니 한국인은 나 혼자다. 홍콩, 인도인, 에스토니아, 말레이시아 가족, 코스타리카 등등 제각각의 지구인들이 한 차에 탔다. 그 흔한 중국인도 한 명 없다. 황인종으로 보이는 인물은 홍콩인 중년 여성과 내가 모두다. 게다가 혼자서 여행하는 사람도 나뿐이다. 

소형버스 안에서

  나는 가이드와 동석을 했다. 앳된 스물네 살의 청년, 그는 대학에서 관광학을 전공했단다, 그리고 군대를 2년 다녀왔고… 버스가 하노이의 이곳저곳을 돌면서 여행객들을 픽업할 때마다 그는 뛰어다녔다. 버스가 가득 차자 외곽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시각이 아홉 시 나는 7시 45분에 나왔는데 본격적으로 하노이를 출발한 것은 9시다. 그래 그럴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억울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어쩌랴.

  하노이 외곽을 벗어나자 버스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상하 행 모두 6차선이다. 도로의 포장이 말끔하다. 최고속도 1차선, 120Km 최저 80Km 한국보다 더 달려도 된다. 그러나 버스는 새 차 같은데 100Km도 안 되게 달리고 있다. 가이드에게 이 도로 언제 건설했냐고 물었더니 올해 준공되었다는 것이다. 올해 이전에 하롱베이를 다녀온 사람들 고생 많았을 것 같다. 

  버스는 휴게소를 한번 들르고 하롱 시내로 접어들었다. 강의 하류, 바다와 접해있는 하롱시는 하노이처럼 스모그로 뿌옇다. 카르스트 지형 탓인지 강 옆은 전부 습지다. 곧장 바다로 향할 줄 알았는데 차는 진주 전시장에 정차한다. 말이 전시장이지 진주 파는 가게다. 진주를 어떻게 양식하고 가공하는가를 안내 점원이 열심히 영어로 설명한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강의에 열중하지 않는 불량 학생이 된다. 그리고 대충 가게를 둘러본다. 제법 예쁘다고 생각되는 목걸이는 수십만 원부터 백만 원이 넘는 가격이다. 누가 사나 했더니 유럽인 몇몇이 흥정을 하고 있다. 아내가 보석 탐이 없어서 다행이다. 그래도 내 눈에는 예뻐 보이는 진주인데…          

     ○ 하롱베이는 사진 도둑        

    일행은 가이드를 따라 바이짜이 선착장에서 배를 탔다. 출발지에서 다른 버스를 탔던 여행객들까지 가세하여 대략 40여 명이 한  배다. 배는 출발하자 곧바로 점심이 나온다. 생선 튀김, 새우, 오징어, 조개찜, 달걀말이, 롤 튀김, 볶음국수, 야채 요리까지 비싸 보이지는 않지만 한 상이다. 나는 인도인 넷, 홍콩 여자와 함께 한 테이블에 배정되었다. 다들 나보고 먼저 음식을 가져가란다. 외국인들도 경로우대는 아는구나! 시장했던 탓에 게걸스럽게 접시를 비우고 경치에 집중하기로 한다.

선상에서 점심을

  배가 바다로 얼마 가지 않았는데 벌써 섬들이다. 대략 삼천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하롱베이는 코스도 여럿이라고 한다. 우리는 대략 주어진 일정 속에서 승솟 동굴 섬, 티톱섬, 수영과 카누 등등의 일정으로 짜여 있다. 일행 모두는 사진 찍기에 바쁘다, 창가에 앉은 나도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파도가 없는 잔잔한 바다에는 작고 뾰족한 수많은 섬이 떠 있었다. 나의 고등학교 후배이자 나보다 훌륭한 시인인 함민복 시인은 섬을 다음처럼 노래했다.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 함민복 「섬」 전문     

    그렇다 나도 동의한다. 오래전에 시인 정현종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나는 그곳에 가고 싶다”라고 노래했었다. 이 또한 공감한다.     

  연신 사진을 찍어댄다. 안 찍으면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름다운 곳에서는 셔터를 눌러댄다. 아름다운 순간을 오래 기억하기 위한 방식이다. 나도 그렇다, 다만 나 혼자가 아니라 가족들, 주위 사람들, 제자들과 아름다움, 감흥의 정취를 나누고 싶은 욕망에서다. 

  하롱베이는 물과 흙과 아니 땅과 바다와 하늘이 오랜 세월 빚어낸 예술작품이다. 땅과 바다와 하늘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공간이다. 인간의 수명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빚어진 돌섬이 햇빛을 받으며 반짝 빛나고 다시 그 그늘을 바다가 받아주고 섬과 섬이 어울리면서 또 다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과 실지의 정경은 또 다르다. 있는 그대로를 담아두고 싶지만 사진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찍은 사진만으로도 아름다운 곳, 하롱베이에서 절경에 취해 해롱해롱하는 나를 발견한다.     


    ○ 선상에서 만난 한국인 노총각의 사연     

    같은 배 안에는 나 말고 한국인 세 명이 더 있었다. 그들은 나와는 다른 버스를 타고 왔다. 인천에서 왔다는 부부와 부산에 산다는 젊은(?) 청년이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동행을 하면서 친해졌다. 우리들의 이야기 첫머리는 “어디서 왔습니까?”이고 두 번째는 “언제 왔냐?”이다. 그리고 익숙해짐에 따라 “무엇하는 사람이냐?”이다.

부산에서 온 청년은 나처럼 홀로 여행하는 입장이어서인지 부담 없이 내게 다가왔다. 해운회사에서 근무한단다. 그리고 아직은 총각이란다. 앳되어 보여서 나이를 물었더니 예상과는 달리 30대 후반이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결혼 이야기로 접어들자 그는 한숨을 쉬며 자기도 결혼을 하고 싶은데 매번 실패한다고 토로한다. 아파트도 대출받아 마련했고 차도 있는데 결혼 상대자만 없다고 한다. 나는 “아직 인연을 못 만나서 그런 거니 기다리면 좋은 사람 만날 거다.”라고 말해주었다. 사실 아주 상투적인 이야기인 줄 알지만, 점쟁이가 아닌 이상 그 말밖에는 해줄 능력이 없다. 

    취업하고 7년 만에 휴가를 내어서 온 여행이라고 한다. 나는 다시 젊을 때는 다 바쁘다, 나처럼 나이 들면 여유가 생길 거라고 토닥여준다. 그러자 그는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오려고 했다고 한다. 내가 그 이유를 묻자, “너무 힘들다!”라고 답한다. 자기는 외국 선박 회사의 선원들을 코디하는 일에 종사하는데 밤낮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는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을 보여준다. 밤낮으로 마우스를 조작하다 보니 그렇다고 한다. 정말 그의 손바닥에는 끔찍할 정도로 굳은살이 잡혀있다. 세상에 마우스 때문에 그렇게 된 사람 처음 본다.

    그때부터 나는 그의 카운슬러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상담은 그저 들어주는 것, 그리고 어렵더라도 참아라, 건강관리하라, 40대부터는 노년을 대비해 재테크하라, 등등의 조언뿐이다. 사실 나도 잘못하는 것이지만… 그는 며칠 더 하노이에 묵다가 3일 뒤 돌아간단다. 나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힘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둘은 선상에서 연속으로 담배를 피웠다.    

동굴 안에서

  

    ○ 바다에서 등반을     

    배는 승솟섬에 정박해 카르스트 지형의 동굴을 탐사했다. 그저 작을 줄 알았더니 규모가 꽤 크고 예전 중국 곤명에서 본 비슷한 유형의 동굴과는 달리,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색색의 빛깔로 치장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든다. 한국에서 준비해온 플래시 기능까지 있는 셀프 카메라 봉이 제 기능을 발휘한다.

    동굴 탐사를 끝내고 일행은 카누 혹은 사공이 있는 배에 갈아타고 원숭이 섬 일대를 둘러보기로 한다. 나는 혼자이고 힘들 것 같아 10여 명이 타는 배를 선택했다. 에스토니아에서 온 가족, 러시아에서 온 일행과 한배를 타고 우리는 작은 동굴을 지나 배를 탄 채로 지나갔다. 그러자 겉으로 볼 때는 섬이지만 들어서면 마치 섬 안에 갇힌 호수 같은 바다로 진입했다. 그곳에 서식하는 몇 마리의 원숭이를 발견한다. 그런데 여기는 중국인들 천지다. 농민공들로 보이는 내 연배와 비슷한 중국인 일행은 난리가  났다. 머리가 노란 사람들이 탄 우리 배를 보자 ‘헬로’를 외치고 손을 흔든다. 아마 신기한 모양이다.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그들은 단체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손뼉을 치고 섬에 메아리가 치도록 목청을 높인다. 한국의 70, 80년대 시골 아저씨 아줌마들이 관광버스에서 했던 모습과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어글리 차이니즈’라고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들만의 힘들었던 삶, 가슴속에 응어리진 시간, 갇혀 있던 세월이 그렇게 하게 만들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뱃머리를 돌려 이번에는 티톱 섬, 호찌민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소련인 우주비행사의 이름을 붙인 섬이란다. 가이드는 수영과 산책 중 선택하라고 한다. 젊은 여행객 서넛이 수영을, 나머지는 모두 트레킹이다. 나도 수영 대신 트레킹이다. 내 나이에 수많은 사람 앞에서 몸매 자랑할 자신도 없고, 물도 차가울 것 같아서다. 가이드는 40분이면 충분하다고 하며 50분의 시간을 제시한다. 이미 책자로 섬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절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등반의 길로 접어들었다. 높이는 30미터 428개의 계단이라고 했다. 만만하게 보았는데 이게 아니다. 바위를 깎아서 계단을 만들었는데 그 경사가 심하다. 게다가 계단을 가득 점령하고 있는 중국인 일행으로 인해 올라가기가 번거롭다. 

   우리 일행 몇몇과 함께 계단을 오르다가 잠시 멈췄다. 다리 근육이 힘들단다. 그런데 뒤에서 왜 멈추냐고 그런다. 나는 “베리 하드” 힘들다고 엄살을 떨었더니 중남미에서 온 젊은 여성이 뭐가 힘들다고 그런다. 그러면서 자기가 선두에 선다. 청바지 핫팬츠 차림의 젊은 여자가 앞 그다음이 나, 그리고 혼혈의 여성 둘, 히잡을 쓴 인도네시아 여성 둘이 뒤따른다. 경사가 심한 곳을 오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시선은 코스타리카에서 온 젊은 여성의 다 드러난 엉덩이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녀는 찢어진 짧은 청바지 핫팬츠를 입고 있다. 가릴 곳만 마치 살짝 가린 듯… 나도 그렇고 그녀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생각해보니 뭔가 민망하다. 다시 순번을 바꾸어 나는 일행의 맨 뒤에서 따라 올랐다. 

티톱 섬 전망대에  올라서

    뱃전에서 코스타리카에서 온 젊은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냐고 물었다. 자기 집에서 온다면 온종일 비행기를 타야 하지만 자기는 카자흐(?)에서 왔다고 한다. 나는 카자흐스탄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아니란다. 내가 그녀의 발음을 잘못 들은 탓이다. 카타르? 아니면 내가 모르는 곳 어디일 것이다. 

   한나절 여행을 하는 동안 인도인들, 홍콩 여자 그리고 몇몇 유럽인들과 말을 트고 친숙해졌다. 다들 점잖고 예절도 바르다. 어쨌든 중국인이 일행 중에 없는 것이 다행이다.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중국인들과 같은 일행이 되었다가 하도 시끄러워서 질색한 적이 있다. 어린아이까지도 그랬다. 그 이유 때문인지 요즘은 중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

   하롱베이 투어는 선상에서 일몰을 맞는 것으로 일정이 끝났다. 내가 처음 이곳을 알게 된 것은 2000년 미국 연수 가는 길에 기내에서 접한 “모닝 캄”이란 책자에서였다. 대한항공 기내 잡지인 그 책에서는 대한항공이 하노이에 직항노선을 개설했다는 내용과 함께 하롱베이에 대한 기사와 사진을 게재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런 곳도 있구나 하면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뒤 거의 20년이 지나서 사진이 아닌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것이 경이롭다. 그렇기에 정취가 새로운 것일 터이다. 내가 하노이에 오기 전에 이미 몇 년 전 이곳을 다녀간 아내와 아들은 ‘하롱베이는 물도 더럽고 별 볼 것 없다’고 했다. 나는 하노이 가면 꼭 그곳을 가보라고 권했었다. 그런데 실망이라니,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내가 직접 그렇게 실망스러운 곳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유심히 바닷물도 보고 혹 쓰레기들도 둥둥 떠다니는지도 세심히  살폈다. 하지만 아니었다.      

    하롱베이는 내가 다녀온 곳 중에서 터키의 카파도키아처럼 멋진 곳이었다. 사진보다도 실제 정경이 더 멋있는 곳, 그것을 증명하듯 해 질 무렵이 되자 구름이 일제히 걷히고 푸르고 붉은 하늘을 보여준다. 비 예보도 있었는데, 비옷도 준비해왔는데 말끔히 갠 먼지 없는 하늘과 푸른 바다를 내게 보여주었다. 이게 여행 중에 맞는 행운이다. 차, 배, 일행, 음식, 바다, 섬, 하늘 모두가 만족하는 하루, 그것이 여행 둘째 날의 나의 행복한 기억이다.       


    ○ 유학을 준비한다는 청년과의 조우     

    온종일 나의 친구가 되어준 가이드와 헤어지면서 나는 진심에서 우러난 약간의 사례를 했다. 미국이나 유럽인들은 나를 세오(Seo)라고 불렀지만 가이드는 정확히 ‘서’라고 발음하곤 했다. 아마도 박항서 감독 덕일 것이다. 나와 여러 이야기를 나눈 그는 일행 중에도 특별히 나를 챙겨주곤 했다. 타국에 와서 아들 제자뻘의 친구를 사귄 것이다. 호텔 가까운 곳에 나를 내려준 그는 나와의 헤어짐을 진심으로 섭섭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쩌랴 그와의 인연이 그것뿐인 것을…

    오후 9시 저녁 먹기에는 늦은 시간이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하며 식당을 둘러보다 널찍하고 건물 밖의 자리에도 손님들로 가득한 레스토랑으로 접어들었다. 엊저녁 식사는 간소하게 했으니 다소 가격이 있더라도 오늘은 제대로 식사를 하자는 심산이다. 3층쯤 되어 보이는 식당 밖에도 유럽인들이 다수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건물 내 이 층의 자리로 안내받았다. 내가 착석한 바로 옆에는 한눈에 보아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홀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도 나를 알아보고 “한국인이시지요?”라고 말을 건넨다.

    그는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고, 나는 베트남 전통식 즉 베트남 정식을 시켰다. 식사하는 동안 격 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직장을 다니다가 유학을 결심하고 우선 하노이 사범대학의 베트남어 연수 과정을 신청했다고 한다. 학비는 한 학기에 한화 90만 원 정도인데 방값이 만만치 않다고 했다. 한 달에 40~50만 원은 각오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베트남 전통식의 소고기 조림과 반찬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무언가 더 자신에게 투자해야 할 것 같아 고심 끝에 결정했다는 그 청년은 부모님에게 부담을 드릴까 봐 걱정이라고 했다. 내가 볼 때는 착하고 긍정적인 청년이다. 나는 그에게 “한국이란 좁은 울타리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즐겁게 하라!”는 어쩌면 상투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사실 조언이라기보다는 격려의 심정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철학자 최진철의 언급처럼 인간의 품격은 생각의 폭과 넓이에 좌우된다. 생각의 깊이나 넓이는 어느 건축학자의 지적에 의하면 공간과 비례한다고 한다. 유아 때부터 청소년기까지 집, 학교, 학원, 독서실, 다시 집으로 이어지는 좁은 공간 속에서 억압된 채로 갇혀 사는 삶은 사육시설 속의 닭이나 돼지와 크게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런데도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타국에서의 생활이나 여행이 주는 값진 의미 중 하나는 ‘넓은 공간 그리고 낯선 사물이나 사람들과 접하면서 우리는 새롭게 자기반성이나 인식을 하게 된다.’는 점일 것이다. 

    식당에서 만난 청년과 악수를 하며 헤어지면서 “베트남에서의 생활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를 빕니다.”라며 덕담을 건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