괭이밥 꽃피던 날들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한때 연이어 피어나던 꽃들이 모두 지고 난 어느 날, 베란다에 놓인 군자란 화분의 모퉁이에서 그들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저 흔한 잡초려니 여겼다. 며칠 뒤 그들은 하트 모양의 작은 세 장의 이파리 위에 꽃대를 올리고 앙증스러운 꽃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봄꽃으로 소란스러웠던 사월과 녹음으로 무성해지기 시작했던 오월을 지나 꽃들도 신록도 시들해지는 유월에 그들이 소도시 변두리의 아파트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때쯤 나는 한 학기 강의를 끝내고 지쳐 있었다. 힘든 것은 강의 때문이 아니라 시름시름하는 몸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편두통과 어지러움으로 신경과를 그리고 복부 통증으로 내과를 드나들며 초음파, CT, MRI 검사를 받던 시기였다. 혹시 예전의 종양이 재발한 것은 아닌지 근심하며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올 때에 대비해 마음을 추스르던 시기였다. 얼굴은 수척해지고 표정은 어둡던… 습하고 눅눅한 장마철의 공기처럼 암울함으로 이어진 날들이었다. 그때 문득 ‘고통’이란 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몸이나 마음의 아픔이나 괴로움’이란 사전적인 의미를 떠나 되새길 때마다 그 뜻의 테두리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불교적인 용어인 고해(苦海)가 지시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어쩌면 아픔과 괴로움의 연속 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을 끊임없이 인내하는 과정이 삶일는지도 모른다. 울음으로 시작되는 인간의 삶. 우리 삶의 대부분은 고통이고 기쁨은 마치 번갯불처럼 잠깐 반짝이다 사라질 뿐이다.
태어남도 고통이지만 늙는 것도 그렇다. 그다음의 병듦(病)과 죽음(死)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부처의 인생팔고(人生八苦)를 보면 헤어지는 것도, 욕망하는 물건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라고 한다. 불가에서는 ‘구별하고 가치부여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괴로움(苦)이 기인하는 것이므로 사물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범속한 나로서는 아직 깨달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저 괴로움을 잠깐 잊는다거나 고통으로부터 도피를 꿈꾸는 것이 거의 전부일 것이다.
몸이 힘들 때면 진통소염제를 복용한다. 물론 의사의 권유와 처방이 있을 때만 횟수를 줄여서 하지만… 나도 남들처럼 마음이 괴로울 때면 술을 마신다. 그리고 잠깐의 위로를 위해 담배도 피운다. 이 모든 행위가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수술 이후에도 늘 무겁고 저린 왼쪽 팔,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목의 통증 그 외 무슨 손님처럼 찾아드는 잔병들… 육체적인 고통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표상이다,” 혹은 “나이 들면 다 그런 것이다”라고 하여 일반화시킨다든가 “그저 무시해버리자”라며 스스로 뇌를 세뇌해 보려 하지만 뇌 신경과 인지체계는 나의 의도에 반응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의학 관련 드라마나 건강정보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은 시청하지 않는다. 고통의 기억을 환기하는 정보나 자극은 회피하고 싶은 본능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시를 쓸 때도 ‘눈물’, ‘고통’, ‘슬픔’, ‘죽음’과 같은 시어들은 피하고자 한다. 하지만 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들은 잡초처럼 끼어든다.
늘 아름다움 속에,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삶의 거의 전부를 채우는 것은 고통, 괴로움, 불안, 염려, 우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잠깐이라도 빛나는 아름다움과 기쁨을 소망한다. 그 빛을 그리워하고 열망한다. 잠깐만이라도 환하게 빛나는 세계에 대한 갈망이 우리를 살게 하는지 모른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아름다움과 마주칠 수 있다면, 짧은 순간만이라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번갯불 같은 일순간의 빛이라도 반짝인다면 그날은 행복한 날이었다고 여기고 싶다.
“군자란 화분에 토끼풀이 무성하네!” 베란다에 놓인 화분들을 바라보며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뽑지 말고 그냥 두세요!” 물주는 일을 담당하는 아내가 웬일인지 그냥 두라고 한다. 아이처럼 쭈그리고 앉아 군자란 주위에 무성한 잡초를 바라본다. 어릴 적에 늘 ‘토끼풀’로 부르던 클로버인 줄 알았는데 생김새가 약간 다르다. 잎의 끝부분이 더 오목한 것이 잎의 생김새가 완벽한 하트 모양이다. 베란다에 비추던 햇빛이 사라진 늦은 오후에 보니 그것들은 마치 나비의 날개처럼 잎을 반으로 접는다.
햇빛이 비칠 때는 잎을 폈다가 저녁이면 다시 접는 향일성 식물인 그의 이름이 ‘괭이밥’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며칠 뒤이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가는 꽃대 위에 분홍색 꽃을 피웠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꽃 이름은 ‘자주괭이밥’이고 ‘사랑초’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꽃말은 여럿이 있는데 그중에는 ‘천사’라는 의미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장마가 시작된 습하고 무더운 유월, 통증으로 병원 문턱을 들락거리던 우울한 날에 그가 찾아왔다. 마치 푸른 날개의 천사가 부끄럽게 웃고 있는 듯 피어난 괭이밥이 생명의 아름다움을 내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나의 어두운 마음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미니장미 화분에도 노란 꽃을 피워 올리는 괭이밥을 나는 발견할 수 있었다.
괭이밥 꽃이 별처럼 피는 날도 있네요.
불안과 우울이 부유하는 세상
가라앉고 구겨진 채로 하루하루가 걱정이지만
한적한 소도시의 아파트 구석에서
작은 꽃잎을 기쁨처럼 희망처럼 피워 올리네요.
언제 어디서 베란다까지 왔는지
이른 봄부터 피우던 꽃들도 모두 지고 난 뒤에
군자란, 장미 화분 빈터에서 잡것으로 자라나
관심도 없고 이름도 모르던 괭이밥이
맑은 어둠에 점점이 뜬 별 같은 꽃을 피웠네요.
시름 속 술에 취해 잠든 저녁에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난간을 타고 왔는지
바람 센 날 천사처럼 날아왔는지
하트 모양의 이파리 위에 가냘픈 꽃대를 올리고
뜻밖의 기쁨을 보여주네요.
- 「괭이밥 꽃 피는 날」 전문 (계간지 <시와 문화> 2021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