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5.
‘네 꿈은 뭐니?’
이 질문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어려서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속으로 그랬다. ‘질문하는 어른, 당신은 꿈이 뭐였나요? 이뤘나요?’ 꿈을 묻는 어른에 대한 불신이 강한, 한마디로 상당히 저항적인 사춘기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래서인지 나는 청소년들에게 꿈을 묻는 어른은 아니다.
어른들의 질문에서 ‘꿈’이란 보통 ‘특정 직업’이 되는 것과 같은 질문일 때가 많다. 그리고 그 질문을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어른치고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은 거의 없다. 더 최악은 그 질문이 ‘어떤 대학과 어떤 직종’을 물을 때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교묘하게 꼬드긴다. 청소년기에 성적을 잘 내야만 꿈을 이룰 수 있다고. 그러니 모든 것을 미루고 그 꿈을 위해 ‘공부’하라고. 시험 성적에 매달리라고.
정말 그럴까?
아니다. 교육자로서 분명하게, 절대 그렇지 않다고.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즉 내가 짜장면을 좋아한다면, 많은 중화요리를 먹어보고 나서 갖게 되는 것이다. 우동, 짬뽕, 울면, 기스면, 짜장면 등등을 많이 먹어보고 나서 형성된다는 것이지, 짜장면만 먹어보고는 짜장면이 다른 면 음식보다 자신의 입맛에 더 맞는지 절대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가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꿈’이라고 하기 위해선 많은 경험을 해봐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의 ‘꿈’을 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자신이 이루지도 못하고 꿔보지도 못한 삶에 대한 ‘꿈’을 아이들에게 요구하고, 아이들에게 상처를 준다. ‘그 성적으로 무슨 꿈을 꿔?’라면서.
푸른꿈고에는 중학교 3년 만에 좌절하고 힘들어하는 청소년들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은 그들이 경험한 학교와 어른들의 평가에 좌절하고 방황하며, 힘들어하고 있다. 그런 아이들을 만난 푸른꿈고 교사들은 그 아이들의 방황이야말로 가장 건강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푸른꿈고 졸업생들은 교사들의 믿음이 맞았음을 25년간 수많은 사례로 증명한다.
길 찾기에 최적화되기 위한 방법 : 방황
올해 졸업생 중에 3학년이 되기 전까지 모든 어른을 힘들게 했던 학생은 모 국립대 성악 전공으로 대학에 당당하게 합격하였다. 중학교 시절에는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중2병을 앓았고, 그 병의 여파는 고2가 되어도 여전하였다고 한다. 그런 그 아이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매력을 발산하기 위해서 혹은 음악으로 자신의 넘치는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곤 하였는데, 이를 눈여겨본 선생님들은 학생에게 음악 전공을 권했고, 성악가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결국 그 아이의 방황은 자신의 길을 찾는 나침반이 되었다.
어렸을 적 동네 이곳저곳을 누비다 보면 얼마 안 가 그 동네가 어떤 모습인지 머릿속에 환히 들어오는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길을 잘 찾는 아이가 되려면 여기저기 마구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을. 그런 쏘다닌 경험은 길을 잘 찾는 방법과 더불어 자신감마저 길러준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른이 혹은 사회가 바라고 심어준 ‘꿈’이 아니라,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경험하여 스스로 알게 된 것들에 의해 스스로가 정한 ‘꿈(혹은 직업일지라도)’이야 말로, 그가 진정 이뤄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호모사피엔스의 방랑벽
2024년을 살아가는 어른들이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는 호모사피엔스라는 것이다. 약 20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 지구 여기저기로 호모사피엔스들은 방랑을 시작하였다. 산악지역이나 넓은 평야를 만나도 정착하는 대신 호모사피엔스들은 계속 걸었다. 현재를 사는 호모사피엔스들에겐 조상들의 지칠 줄 모르는 방랑벽이 DNA에 새겨져 있다. 탐험과 헤매는 기질이야말로 우리를 지구 최상의 존재가 되게 한 것이다. 호모사피엔스의 이러한 기질은 원시 여러 부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파라과이 Ache족과 남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Kung족, 베네수엘라 Hiwi족은 이웃 지인을 방문하기 위해서 수십 킬로를 밤낮으로 걸어가 두어 시간 머물다 돌아온다고 한다. 현대인 모두가 이런 기질이 있는 것이다.
「길 잃은 사피엔스를 위한 뇌과학」(마이클 본드 저)에 나온 ‘우리는 뻣속까지 탐험가이며, 공간 능력은 근본적인 인간의 조건이다’라는 말에 격하게 동의한다.
결국 청소년기의 예측 불가능하고 엉뚱한 행위들은 성인이 된 다음 삶을 이끄는 역량과 연결이 되어 있다 본다. 이는 나의 개인 주장이 아니다.
핀란드인의 길 찾기 능력
핀란드 교육자들은 문제해결, 사회성, 충동 조절, 인지 유연성 등은 비체계적인 놀이를 통해 가장 효율적으로 학습되고, 즐겁게 학습할 때 가장 잘 기억된다고 믿는다. 핀란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독일의 발도르프-슈타이너와 이탈리아의 몬테소리 체계를 따르는 학교에서는 일반적인 학교의 보편적인 시험 위주의 교육 대신 탐험과 공간지각, 자기주도 학습을 권장하는 핀란드와 유사한 교육방식을 따른다.
다수의 핀란드 아이는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읽기 쓰기를 배우지 않지만, 중학교 시기부터 수학과 과학, 그리고 문해력에서 다른 OECD 국가들에 비해 압도적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핀란드 사람들의 길 찾는 능력도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성장한, 충분히 방황하며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어린 시절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A. Couttot et al.(2018) ‘Global determinants of navigation ability’, Current Biology 28(17), pp.2861-6. https://pubmed.ncbi.nlm.nih.gov/30100340/)
‘야간 자율학습’을 이야기 하는 전북 교육감
모든 과학적 데이터가 가리키는 방향을 무시하고 자기 경험만이 답이라 생각하는 교육자들이 있다. 비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자가 리더가 되면 어떤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역사 속엔 사례가 많다.
며칠 전 학생들의 기초학력, 기본학력을 향상시키는 교육청의 정책을 안내하는 회의에 갔다가 고구마 백 개를 한꺼번에 먹은 듯한 느낌을 가졌다.
전북교육감은 중고 교장 수백 명 앞에서 ‘야간자율학습’ 부활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그의 교육관은 단순하고 단단했다. 시험 많이 보고, 학교에 오래 붙잡아두면 ‘성적’이 오르고, ‘좋은 대학(in 서울)’에 많이 가며, 이게 미래인재를 기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라는 것이다.
전라도 말로 ‘어쩌쓰까’가 절로 나왔다.
AI 시대를 대비한다는 것이 고작 학교에 더 붙잡아두어 수능점수 올리기라니. 모두가 겪었듯 과거 개발도상국 시절인 1981~1998년에는 학생들을 밤까지 학교에 묶어두고 강제로 공부시키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1960~1980년대생들은 야자의 '야' 자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그러다 1995년 7월 22일 춘천고 최우주 학생이 강원도교육청과 교육부, 청와대 등지에 보충학습이 학생들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민원을 냈고, 이를 각종 언론이 보도하면서 사회적 파장이 일었고, 이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강제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폐지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었다. 전북에서도 2000년 9월 초에 전주 모 여고의 2학년생 김모 양이 강제 보충수업을 거부하면서 그녀의 아버지가 교육청에 탄원서를 낸 사건이 있었다. 이 일은 언론에서 다뤄졌고 전북지역에서도 강제 자율학습이 사라졌다. 그런데 20년이 넘은 지금 전북교육감은 다시 시대에 맞지 않는 교육정책을 말하고 있다.
(2001년 경향신문 https://www.bigkinds.or.kr/v2/news/newsDetailView.do?newsId=01100101.20010207000000601)
전북교육감은 전북대 총장을 8년간이나 한 사람이다. 대학을 이끌었던 수장의 머릿속 ‘학력’이란 도대체 뭘까?
전북 학생들의 학력이 떨어졌다는 기준도 모호하다. 어떤 이는 서울대학에 들어가는 과거와 현재의 비율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서울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인가? 서울대학 졸업생들만이 세상에 가치 있는 ‘꿈’을 이룬 사람들인가?
그런 논리라면 서울대나 인서울에 못 간 나머지 모두는 실패자가 되는 프레임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기준이다.
교육감은 교육의 격차를 최소화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는 자다. 이미 우리 모두는 다 알고 있다. 부모의 경제력이 아이들의 학력 격차를 가져온다는 것을. 그러니 교육청은 부모의 경제력이 일으키는 그 차이값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정책을 만들어 힘써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더 이상 교육에서 ‘희망’은 없기 때문이다.
무덤 속 ‘야간자율학습’이 결코 부활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