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철학의 기초 이해하기 (1)
삼법인(三法印)은 불교의 근본 진리를 나타내는 세 가지 법칙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세상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들, 즉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 육체적 상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심지어 우리가 가장 견고하다고 믿는 것들조차도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깊이 이해하면, 우리는 특정한 상태나 물건, 관계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영원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육체, 감각, 생각, 의식 등 여러 요소들이 일시적으로 결합된 상태일 뿐입니다. 마치 수레가 바퀴, 축, 몸체 등 여러 부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의 자아 역시 여러 요소의 결합체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를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존재가 본질적으로 고통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통은 단순히 육체적인 아픔이나 정신적인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직접적인 고통(고고), 즐거움이 변화하여 사라질 때 느끼는 고통(괴고), 그리고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느끼는 근본적인 불안정성(행고)을 모두 포함합니다.
고고(苦苦): 직접적인 육체적, 정신적 고통
괴고(壞苦): 즐거움이 사라질 때 느끼는 고통
행고(行苦): 끊임없는 변화로 인한 근본적인 불안정성
이 세 가지 법인을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불교적 깨달음의 시작이 됩니다. 이 셋 중 '무아'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무아(無我)는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흔히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는 고정되거나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조건과 요소들의 조합이라는 것이 무아의 핵심입니다.
불교에서 "나"를 부정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아(我)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고통을 겪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나"가 있다고 믿습니다.(예: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 "내 인생"이라는 관념.)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나'는 환상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무아"는 "나"라는 실체가 없으며, 존재는 오직 조건에 의해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불교는 무아를 다음과 같은 논리로 설명합니다.
오온(五蘊): '나'를 이루는 다섯 가지 요소
불교에서는 "나"라고 생각되는 것은 다섯 가지 요소, 즉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봅니다:
색(色): 물질적인 몸과 외부 환경. 예: 내 몸, 주변 사물.
수(受): 감각을 통해 느끼는 즐거움, 고통, 중립적인 느낌. 예: 기쁨, 슬픔, 무덤덤함.
상(想): 인식과 기억. 예: 어떤 대상을 보고 "이것은 나무다"라고 생각함.
행(行): 의지적 행위와 습관. 예: 어떤 행동을 하려는 욕구, 마음의 충동.
식(識): 의식, 인지 작용. 예: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마음.
이 다섯 가지가 모여서 "나"라고 여겨지지만, 사실은 각각 독립적이고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정된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아"라는 개념에 대해 좀더 살펴보기 위해 서양 철학사에서 개체를 설명하는 관점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서양 철학에서 개체화 원리(Principle of Individuation)는 사물이나 존재가 어떻게 각각의 개체(Individual)로 구분되고 독특성을 가지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철학적 개념입니다. 이 원리는 주로 형이상학, 존재론, 그리고 인식론에서 논의되며, 특히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어떤 존재를 고유하게 만드는가?"
"왜 두 개체는 서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고대 철학과 중세 철학은 개체를 형이상학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와 연결지어 이해했습니다. 즉, 개체는 어떤 보편적 형상이나 이상적인 원리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여겨졌습니다. 중세에서는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개체의 본질과 존재를 설명하는 근본 원리로 작용하였고, 개체는 보편적 규칙(형상)을 구체화하는 존재로 바라보았습니다.
근대 철학에서는 고대와 중세 철학이 다룬 개체의 개념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근대 철학은 주체성과 자아의 개별성을 강조하며, 주관적인 경험과 인식을 중심으로 개체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데카르트는 개체를 자아로서 정의했습니다."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에서, 개체는 사고하는 주체로서 존재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개체의 본질을 자아의 사고로 보고, 물리적 세계의 존재보다 자아의 존재가 더 확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체는 자신의 의식적 경험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며 존재하는, 주체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데이비드 흄은 개체를 인식의 결과물로 봤습니다. 흄은 개체의 정체성이 단지 감각적 경험의 연속으로서 형성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개체는 고정된 본질이 아닌 변화하는 경험의 집합이며, 자아는 불완전한, 계속 변하는 경험의 흐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흄에 의하면, "나"는 그저 감각과 경험의 연속체일 뿐이며, 고정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개체를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했습니다. 칸트는 개체를 인식의 주체로 보고, 개체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세계와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식하는 주체의 한계를 인정하며, "사물 그 자체"는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개체는 자아와 세계의 객체 사이에서 형성되는 경험적 실체로 존재합니다.
헤겔은 개체를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이해했습니다. 개체는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되며, 자기실현을 통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인식합니다. 개체는 주체적이고 변화하는 존재로서, 역사적 과정 속에서 점차 발전한다고 보았습니다.
현대 철학에서는 개체화 원리가 형이상학, 언어철학, 그리고 심리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논의됩니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개체화에 대해 설명하면서, "존재" 자체가 개체화의 원리로 작용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개체를 "세계-내-존재"로 이해하며, 개체가 특정 존재로서 형성되는 과정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개체는 단순히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체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그 정체성을 확립합니다.
들뢰즈는 개체화를 차이와 변화의 과정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고정된 본질을 가진 개체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개체는 끊임없는 차이화(differentiation)의 결과로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개체는 정적이지 않고 동적인 존재로, 반복과 차이를 통해 끊임없이 변하는 과정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존 듀이는 개체화를 경험적 과정으로 보고, 개체가 형성되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요소나 존재론적 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체의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듀이는 개체화가 상호작용을 통해 발생한다고 보고, 개체는 사회적, 문화적, 경험적 관계 속에서 발전한다고 봤습니다. 그에게 개체화는 상호작용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으로, 경험을 통해서만 진정한 개체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불교의 '무아'는 흄의 설명과 유사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개체는?
생각과 인식의 주체
경험의 결과물
세상 속에서 세상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 존재
불완전한, 계속 변하는 경험의 흐름
등등 서로 상충되지 않는 개념들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중 불교는 자기라는 확고하게 정해진 존재가 없다라는 면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로는 혁명적이었겠지만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적어도 머리로는 말입니다. 단어가 어렵지 개념은 아주 쉽습니다.
삼법인을 알고 나면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7-80년대에는 염세주의 철학자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는데 요즘은 유툽 틀면 나오는 인기있는 철학자로 떠오르고 있죠.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힌두교와 불교를 깊이 공부했고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철학과 삼법인 사이의 흥미로운 공명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관점은 쇼펜하우어의 '표상으로서의 세계' 개념과 연결됩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 세계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표상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불교의 무상 개념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쇼펜하우어의 개체화 원리 비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는 개별적인 자아가 사실은 근원적 의지의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불교가 무아를 통해 해탈을 지향한다면, 쇼펜하우어는 보편적의지를 극복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보는 편입니다.
*쇼펜하우어의 개체화 원리 비판이란?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개체화의 원리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나라는 개체와 너라는 개체가 완전히 분리된 존재라는 착각에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오류입니다. 우선 개체화는 표상 세계에서만 유효합니다. 우리가 보는 개별적인 존재들, 즉 '나'와 '너'의 구분, 이것과 저것의 구별은 시공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는 실재의 참모습이 아닌 현상일 뿐입니다. 오직 실재하는 것은 하나의 보편적 의지입니다. 개체화 원리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하나의 동일한 의지입니다. 보편적 의지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이며 자연적인 충동으로, 물리적 세계, 동물, 인간 등 모든 것에 내재해 있는 근본적인 운동의 원리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세계의 본질"로 설명합니다. 이 의지는 생명체가 살아가고 성장하며, 자기 보존과 번식을 추구하는 기본적인 힘으로 작용합니다. 의지는 목표 지향적이며, 언제나 완성을 추구하지만 결코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끝없는 갈망을 불러일으키며, 이러한 갈망은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존재로 이어집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는 가장 명확한 접점을 보여줍니다. 쇼펜하우어는 삶의 본질이 고통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맹목적 의지가 끊임없이 욕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대응에서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불교는 고통의 원인인 무명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적극적인 수행의 길을 제시합니다. 이는 불교가 깨달음을 통한 완전한 해탈의 가능성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적 관조나 금욕적 삶을 통한 의지의 부정을 강조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일시적인 초월이나 고통의 완화를 현실적인 목표로 보았습니다.
쇼펜하우어 철학이 2020년 이후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 그리고 불교철학과의 가장 큰 공통점은 삶의 본질이 고통이라는 것. 따라서 이 고통이 나의 잘못이 아니며 보편적이라는 주장에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 해결방식에 있어서 불교의 방식은 제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고 설득력도 없어요. 저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보편적'의지'가 동식물뿐 아니라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에게도 존재하며 우주의 물질과 기계에도 존재하는 생존과 확장을 이어가는 힘이라고 보는데요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돼 있는 생존을 위한 본능도 포함된다고 봅니다. 이러한 본능에서 완전히 해방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아요. 무의미한 노력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의 제안 정도가 현실적인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수행으로 본능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당시의 과학적 수준에서만 가능한 주장이 아니었을까.
무상과 무아를 깨닫는다는 것은 일상적 삶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주변 혹은 소유물에 대해 집착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나라는 존재를 포함하여 내 주위의 모든 것은 변하며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받아들였다면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 집착하지도 또 그것을 잃었을 때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게 된다는 건데. 혹은 적어도 덜하게 된다는 건데요. 하지만 욕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봐요. 다만 본인이 지나치다면, 욕망과 집착이 강하여 끊임없이 슬퍼하고 괴로워 한다면 수행에 들어가는 것도 필요할 수도 있겠네요. 저는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욕망이 줄어드는 것이 아쉬운데요. 이 또한 나에게 일어나는 변화이니 받아들이고....
적당한 관조
관계의 거리두기
하고싶고 이루고 싶은 일에 적당히 몰두하기
적당한 돈
건강
어딘가 잘못되면 그러려니 하기
불교철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느끼는 곤란함은 제가 이 철학의 궁극적 도달 지점. 열반 또는 해탈이라는 목표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제 생각에는 석가모니가 하려고 했던 건 종교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이 세상에 대한 설명(종교 즉 당시 힌두교의 설명을 대체하는), 지옥 또는 업보의 대체재(=윤리적 기준), 천국 또는 해탈(힌두교의 신 브라만과의 합일)의 대체재(=인생의 목표)를 제공하려고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목표 따위는 없으며 도덕이란 인간의 DNA에 각인된 것이고, 삶은 기본적으로 허무한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무신론자에게 열반이나 해탈은 전혀 매력적인 수행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사성제:고통의 본질과 그 해결책 그리고 팔정도:깨달음에 이르는 여덟가지 길에 대해 정리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