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제너레이션
서른을 갓 넘긴 시절이자 만 나이로는 아직 이십 대였던 때, 마치 이제는 온전한 어른 역할을 해야 했던 것 같았을 때, 그럼에도 치기어림으로 인생의 방향을 용기 내어 약간 돌려봤을 때,
나는 다행히도 한 조직에서 아주 다정한 팀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제 한 부서에서 만났던 같은 팀 동기들.
해외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탓에 나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모두 해외 출신 대학이거나 대학교 영어영문 출신.
하지만 나를 더 혼란하게 했던 건 그들이 어디 큰 조직의 자녀와 손녀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영화제 바이어를 이미 사석에서 만나 인사를 했다든가,
혹은 초청하는 회사나 감독 배우와 친분이 있다든가.
혹은 여기서 밝힐 수 없는 그룹의 자녀라든가.
나와는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들 속에서 그 세상에 내가 끼게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어렴풋했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아주 교육을 잘 받은 자녀들이었고,
다행히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덕인지 아주 다정하고 마음의 여유가 있는 친구들이었다.
해외 살이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던 나에게
아낌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주고 현실을 상기시켜 준 그녀들이었다.
그들을 통해 처음으로 미국에서 First Generation이란 단어가 있다고 소개받았다.
'첫 세대', 혹은 '퍼스트 제너레이션'이란 한 사람의 가문에서 대학레 입학한 첫 번째 인물을 칭한다고 했다.
미국은 이 인물이 겪을 강렬한 문화적 충격과 가풍의 변화를 인정하고 그들을 첫 번째 세대라고 부른다고.
이 얘기가 나온 건 내가 그들에게 아마 푸념을 한 탓이었겠다고 기억한다.
미국이나 해외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그런 유학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는 한탄,
심지어 집안에 대학에 간 사람이 없었어서 조언을 구할 데가 없어 지금 출신 대학도 원서를 잘못 넣어 최초합이 됐다는 푸념이었다.
심지어 담임선생님의 조언을 거절하고 상위 지원을 했음에도 말이었다.
그러고 나니 해외 대학을 나온 그들은 그들 세계에서도 첫 번째 세대라고 불리는 학생들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 한 명 나오기가 그 집안에서 아주 어려운 거라고 인식한다고.
그래서 대대손손 내려온 그 가족들과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당혹스러움을 매번 느끼는 사람이라고.
그 친구들은 참 교육을 잘 받은 탓에 가장 나이가 많던 나를 되려 도닥여줬던 기억까지가 있었다.
한동안은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교육을 많이 받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오랫동안이었던 것 같다.
어쩌다 보니 교육열이 높다는 동네에 배정되어서 자란 내 주변에는 나보다 대학을 잘 간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이 가진 교육열은 말 그대로 상상이상이었다.
이미 조기교육을 다 마치고 온 친구들, 소위 엄마 라이딩으로 매번 대치에 가 소수정예 수업을 받는 친구들(서울대에 갔다.), 대체 영어공부를 안 하는데 듣기는 매번 만점을 받는 친구들은 이미 해외에 어린 시절 살다와 귀가 트여있다는 게 저런 거구나 싶기도 했다.
나는 친구들의 교육열에서 풍기는 열기를 느끼며 그저 서울의 높지는 않지만 괜찮은 대학교를 들어가게 됐다.
그랬으니 비교가 안될 수가 있었을까.
그런데 문을 닫고 들어가야 가장 잘 넣은 원서라는 말이 있는데도 나는 보란 듯이 친절히 첫 번째로 문을 열고서는 대학에 들어갔다.
그때는 참 그게 억울했는데, 그래서 대학에 그렇게 정을 붙이지도 않았었다.
그렇게 대학을 다니고, 졸업을 하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그 동기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결혼해서 자녀를 낳은 한 그룹의 자녀를 SNS를 통해 보고 있노라면 해외 대학을 나와 부족함 없이 대체로 인생이 행복했다던 그녀가 약간은 부러웠다.
부러움이라는 걸 잘 느끼지 않는 성격임에도,
그런 감정을 느끼고 나면 최근 이사 온 집 앞 공원을 자주 나갔었다.
서울의 끝자락에 위치한 그 공원을 돌고 돌고.
회한에 섞였다가 체념했다가 담담했다가 자신했다가.
그렇게 회사는 나와도 연결되어 있는 사회연결망을 들여다보고는 몇 번은 더 돌았던 것 같다. 그 공원을.
그러다가 문득이었다.
아 나의 부모는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일찍이 사회에 나가 돈을 버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했던 두 인물 사이에 초등학교 5학년 갑자기 영어학원을 가야겠다며 조르던 딸내미가.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도 몰라 초등학교 1학년들과 같은 반을 해야 한다고 괜찮겠냐고 묻던 원장님의 상담에 우리 엄마는 아마 쟤는 괜찮을 거라고 했다고 했다.
그러고선 종종 일이 일찍 끝나는 날에는 몰래 학원을 와봤다고.
믿지만 행여나.
사실 그들의 당혹스러움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을 테다.
그저 평범한 아이로 자랄 것 같았던 애가 유치원에 딸린 피아노 수업을 듣더니 악보를 보지 않고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고,
온전히 귀로만 계이름 5개를 모두 구분할 수 있었으니.
유치원 피아노 선생님은 종종 나를 데리러 오는 엄마를 보고 아주 신기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어린 나는 자연스럽게 장래희망으로 피아니스트를 적어내곤 했었지만 그런 엄마가 걱정되었던 이모들이 우리 집에 출동해 피아니스트는 돈이 많이 든다고 했다. 되게 여러 번. 그때가 7살이었나, 8살이었나.
그렇게 생각의 꼬리를 물고 공원을 돌다 보니, 다시 공원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집안의 첫 번째 세대여서 남들보다 더 애써야만 했다던 나의 애써왔음보다
나의 부모 세대가 첫 번째 세대일 것 같이 태어난 나를 보고 얼마나 당혹스러웠을지 그 아이를 키우기 위해 다른 부모들보다 더욱 애써왔음이 몇 곱절이었을지.
알을 깨고 나왔다던 내 인생에 대한 평가는 오만이었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전에 자신들의 세상을 부수고 있었으니까.
산책은 끝이 났고, 남은 일이라고는 집으로 향하는 것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