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내일까지 비가 오락가락이라고 한다. 날씨도 날씨인 데다가 오늘은 온라인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예 마음먹고 집에서만 지내보기로 했다. 꽤나 집순이인 나로선 오늘도 만족스러운 하루 일거라는 생각이 들어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었다. 입도 전 미리 주문해 놓은 국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반찬도 한 끼 분량 정도 남았다. 쓱배송으로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냉장보관해 둔 (무려) 한우 사골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사골팩을 자세히 확인해 보니 사골곰탕이 아니라 사골육수였더라. 이건 요리할 때 육수로 쓰라고 나온 것 같은데 아무래도 주문을 잘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뭐 비슷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인덕션에 데우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얼려놓은 밥도 오늘 아침이면 마지막이었다. 밥도 새로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기밥솥에도 쌀을 안치고 밥을 짓기 시작했다. 남들이 보기엔 그냥 완제품을 사다가 데우고, 있던 반찬을 덜고, 밥은 전기밥솥에게 맡기니 이게 집안일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나에겐 꽤나 바쁜 오전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상을 차리고 알쓸인잡을 보며 아침을 먹었다. 알쓸인잡은 유퀴즈와 더불어 내가 챙겨보는 몇 안 되는 예능인데 내용들이 참 흥미롭다. 이번 주는 지난주에 미처 답을 듣지 못했던 김영하 작가님의 '미래를 만드는 사람'을 소개하는 시간으로 시작되었다. 작가님께서는 당장 누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알츠하이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를 개발할 사람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알츠하이머에 대한 내용을 설명 중이신 김영하 작가님. 출처: tvN 알쓸신잡
인간의 사망원인인 암이나 각종 질병들은 인류가 이를 인지한 이후 적극적인 치료제와 수술법 등을 개발해 왔다. 그에 반해 알츠하이머병은 발견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예방이나 치료, 처방에 대해서는 이전과 나아진 게 거의 없다. 제자리걸음인 셈이다. 심지어 알츠하이머병은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발병률이 무려 224%나 증가했는데 이는 인류의 수명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이상 그 누구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할 수 없다.
방송을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나에게도 가까운 분이 이 병을 앓고 계신다. 그분의 기억 속에 내가 사라진 지는 꽤 오래되었다. 아들과 딸은 물론이고 이젠 음식을 씹는 법까지 잃어버리셨다. 가끔 그분을 뵈러 갈 때면 알츠하이머병이 정말 가슴 아픈 병임을 실감케 한다. 그것은 나의 의도와 무관하게 '사회적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고 이는 곧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개인의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지금의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노년기까지 살 수 있다면 안락사가 합법화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 없었던 인간의 입장에서 개인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죽음만큼은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든, 혹은 어떠한 식으로든 육체적 혹은 사회적 죽음이 나를 덮쳐올 때 나는 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길을 택하고 싶다. 그게 안락사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이후에는 히틀러와 보니것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나서 늦은 아침상을 정리했다. 그리고 예정된 온라인 미팅을 준비했다. 내 지도교수님과 동료 선생님들은 일 년에 두 번 정도 모임을 갖는데 현재 지도교수님께서는 연구년으로 미국 생활 중이셔서 이번에는 온라인으로 뵙게 되었다. 난 (뜻밖의) 회장을 맡고 있었던 터라 더더욱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모임 시작 직전까지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모이지 않아서 초조했는데 늦게라도 참석해 주신 분들이 많이 계셔서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 선생님들의 말씀을 듣고 있자니 학위를 받는다고 다 끝나는 것이 아니지만 확실히 발돋움할 수 있는 스테이지들이 많이 열린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도교수님께서는 나에게 오는 메일이 두려울 정도로(...) 열심히 한다는 말씀까지 들은 만큼 내년 여름에는 꼭 졸업해야지.
이후에는 늦은 점심을 챙겼고 영화와 책을 잠깐 보았다. 숙소에 있던 티비를 오늘 처음 켜봤는데 고전영화인 '오페라의 유령(1943)'과 '오만과 편견(1940)'을 보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고전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편인데 그 흑백영화가 주는 감성과 더불어 현시대에 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작품들을 가끔 만날 때, 고전이 주는 매력은 담뿍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종종 찾아본다.
1943년 작인 '오페라의 유령'은 원작과 다소 다른 스토리이다. 스핀오프 격인 고전 영화.
특히 '오만과 편견'의 경우, 원작 이후에 다양한 버전의 미디어믹스가 제작되었는데 2005년 영화를 제외하면 원작에 가장 충실한 버전은 1940년 작인 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엄청 좋아하는 버전은 아니지만 원작에 대한 애정이 큰 만큼 무난히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다양한 리메이크 버전 중 이 영화가 내 눈에 띄는 이유는 올더스 헉슬리가 각색을 맡았기 때문이다.
눈 뜨고 싶을 때 일어나서 밥을 차려먹고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오늘의 하루를 정리할 수 있는 삶이라니. 제주에서의 일상은 그야말로 꿈결 같다. 그렇지만 꿈은 언제든 끝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끝나는 그 순간까지 이 시간들에 흠뻑 젖어 살아가야지. 인생 역시 마찬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