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도 아닌 빗소리에 정신이 들었던 날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아침이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림 원데이클래스가 있는 날. 2시까지니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일단 밥부터 차려 먹기로 했다. 아침식사는 미리 지어놓은 밥에 사놓은 북엇국과 반찬, 그리고 계란프라이. 반찬은 대형마트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금치와 숙주, 어묵볶음을 사다 놓은 걸 조금씩 나눠먹고 있다. 집에서 해 먹는 밥은 거의 이렇게 고정인데 더 이상의 응용은 어렵다. 난 정말 답 없는 요리 젬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밥을 먹다가 숙주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뭔가 시큼하고 알 수 없는 식감이었다. 그 자리에서 입맛이 뚝 떨어졌지만 다른 음식을 버릴 순 없었기에 남은 반찬들과 국으로 밥을 먹었다. 그리고 반 이상 남은 숙주나물을 버리면서 '나는 반찬을 냉장고에 넣는 것도 못하는 사람인가?' 싶은 생각에 잠시 울적해졌다.
요리와 가깝지 않은 이유는 별 거 없다. 어릴 때부터 뭘 만들어도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일 파스타 하겠다고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곤 파스타면을 태웠다던가, 과일이나 야채를 조각냈다던가, 언 국을 덩어리째로 냄비에 투하해서 사고를 쳤다던가... 나의 요리 졸작썰을 3박 4일을 떠들어도 모자라다. 무엇보다 예전에 김장 돕다가 크게 다친 사건과 이전 연애를 겪으면서 요리와 더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나는 성인이 되었을 때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야지'. 학창 시절 내내 나를 괴롭히던 수학의 영향이 컸다. 재능도, 이해도 안 되는 공부를 억지로 이어나가야 한다는 건 나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다. 그래서 이젠 수학의 늪에서도 벗어났겠다, 더 이상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해나가는 삶을 살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그 다짐은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꽤나 잘 이어져오고 있다(그렇지만 함정은 현재 몸 담고 있는 분야가 사회과학이어서 숫자를 보면서 살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 그래서 이렇게 무작정 제주로 내려온 것이기도 하고.
어쨌든 이런 이유로 요리와는 담을 쌓고 살다 보니 장기여행에서는 항상 문제에 부딪혔다. 평소엔 회사나 학교에서 주는 밥을 먹고, 대충 사 먹어도 일상은 굴러갔지만 여긴 여행지 아니던가. 여행지엔 구내식당도, 익숙하게 드나들던 맛집도 없다. 더군다나 서울을 벗어난 곳이라면 거기가 어디든 서울과 같은 환경을 기대하면 안 된다. 그렇기에 장기여행이란 끼니와의 전쟁이라고도 생각한다. 하루에 세 번이나 무얼 먹어야 할지 고민한다는 것. 정말 번거롭고 성가신 일이지만 '먹고살아야 하는' 인간의 삶을 여행지에서도 씩씩하게 이어나가려고 노력하는 나 스스로가 무척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사람임을 느꼈다.
이런 상념에 빠져있다 보니 벌써 1시가 다 되어간다. 이제는 원데이클래스가 진행되는 화실로 출발해야 했다. 날씨도 좋지 않은 데다가 지독한 길치인 나는 네이버 지도가 알려준 시간보다 두 배는 잡고 나가야만 지각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랴부랴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수업이 이루어지는 화실은 도보로 15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길을 잘 찾은 덕분에 수업시작시간보다 무려 30분이나 일찍 도착해 있었다. 문이 잠겨있길래 그 앞에서 기다렸더니 식사를 마치고 올라오시던 강사님께서는 눈에 띄게 당황하셨다. 오히려 내가 죄송스러웠다. 제가 너무 빨리 온 것이니 수업은 정시에 시작해도 된다고 말씀드렸고 그 사이에 화실을 잠깐 둘러보았다.
희희랑에 앉아서 그림 그릴 준비를 했다. 너무 오랜만에 쥐어본 붓은 낯설었지만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순간들이 즐거웠다.
오른쪽 통창엔 건물 사이로 바다가 조금씩 보였다. 그리고 실내는 잘 정돈되어 있고 차분한 분위기인 공간이었다. 길치와 요리 젬병에 미술 젬병이었던 나는 내가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을지 너무 걱정이었는데 살갑게 대해 주시는 선생님 덕분에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은 법환포구에서의 바다였다. 워낙 바다를 좋아해서 바다를 꼭 그리고 싶었는데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법환포구의 바다색은 다른 곳에선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색이었기에 그림으로도 남기고 싶었다. 네이비톤을 잘 살려보고자 붓질을 시작했는데 즐겁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어려웠다. 어려웠던 이유는 그림 자체가 어려운 게 아니었다. 붓질을 하면서도 내 머릿속은 자꾸 과거와 미래를 오가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느꼈다.
심리상담 기법 중 'Here and now'라는 것이 있다. 우리말로는 '지금-여기'라고 많이 쓰이는데, 나는 심리상담에서 쓰이는 본래의 의미와는 약간 다르게 해석하여 나에게 적용한다. 후회나 아쉬움투성이인 과거를 생각해 봤자 과거는 힘이 없다. 그리고 미래에 생각을 두어봤자 불안감만 높아질 뿐이다. 그러니 '지금-여기'에 집중하자. 지금 내가 쥐고 잇는 붓의 감각, 터치 한 번에 변화하는 색감과 톤, 나이프로 찍어 누르면서 표현하고자 하는 현무암의 거친 질감. 오직 내가 지금 여기에게 보고 느낄 수 있는 감각에만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다. 그렇게 두 시간쯤 지났을까? 드디어 작업물이 완성되었다.
법환포구에서 바라본 바다. 현무암은 나이프를 활용해 거친 질감을 표현해 보았고 가장 중앙에 보이는 작은 섬은 형제섬이다.
고등학교 때 예체능 선택과목을 미술로 하면 대학 못 갈 거라고 하셨던 미술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래도 그런 소리 들었던 학생이 이 정도면 나름 중박 아닐까? 일단 내 눈에는 만족스러우니 조심히 그림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언제 비가 떨어질지 모르는 먹구름이 가득했기에 일단 집에 그림을 두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물기 젖은 서귀포의 거리. 카메라 렌즈를 안 닦은 것도 아닌데 저렇게 뿌옇다.
집에 도착하여 냅다 누웠더니 벌써 시간은 5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그때야 비로소 허기가 몰려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침밥 이후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는 오고 날씨도 안 좋으니 숙소 근처 스타벅스나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에서만 판매되고 있는 메뉴들이 궁금하기도 했고 이럴 때 기프티콘도 털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게 5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스타벅스. 걸어 다닐 때부터 탐나던 창가 쪽 자리가 운 좋게도 비어있었다. 우선 사이렌 오더로 메뉴를 확인하고 'JEJU ONLY' 만을 찾아 주문을 완료했다.
에스프레소 휩으로 변경한 제주 쑥떡 크림 프라푸치노와 제주 녹차 베이컨 치즈 베이글. 둘 다 초록초록한 메뉴들인데 조명이 아쉽다.
원체 달달한 걸 좋아하진 않지만 쑥떡이 너무 궁금해서 음료를 주문했다. 대신 너무 달지 않게 휩도 에스프레소로 변경하고 빵도 단 것과는 거리가 먼 베이글로 주문했다. 음료는 각오하고(?) 먹어서 인지 생각보다 엄청 달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베이글이 환상이었다. 적당히 쫀득한 치즈와 베이컨의 조합은 정말 찰떡이었다. 제주 녹차 베이글도 일반 베이글보다 풍미가 좋았다. 이 맛있는 걸 서울에서 먹을 수 없다는 게 좀 아쉬웠지만 제주에 있는 동안 많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스타벅스에서 어제 숙소 안네데스크에서 빌려왔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기도 했고 브런치 글도 여기까지 썼다. 열심히 글에 집중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캄캄한 저녁이다. 이제 슬슬 일어나서 마트에 들렀다가 숙소로 돌아가야겠다. 오늘 버린 숙주나물대신 새로 먹을 만한 반찬을 찾아봐야지.
오늘의 마지막 컷은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나. 선생님께서 찍어주셨는데 언제 찍어주셨는지도 몰랐다. 감사해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