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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Jan 12. 2023

4. 양혜란식당, 서귀포시중앙도서관, 정이가네

우당탕탕 무계획 제주여행(4) 동네 투어, 도서관 투어(230112)

어젯밤엔 비염이 좀 잠잠해졌다 싶었는데 단단한 착각이었다. 아침에 일찍 눈은 떴는데 코막힘이 너무 심해서 끙끙대다 11시가 넘어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여행지여서 시간낭비라는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오늘부터 제주는 당분간 비가 온다고 하니 먼 곳에 나가고 싶지 않았고 그냥 동네 근처에서 빈둥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워낙 습한 지역이라 그런지 설거지해 놓은 그릇이 아직도 안 마른 걸 보고 '그냥 나가지 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딱새우를 생각하면 안 나갈 순 없지. 어젯밤부터 아른거리던 딱새우장 정식을 먹으러 빗속을 뚫고 나가보기로 했다. 평소에도 딱새우를 좋아하는 편인데 법환포구에서 딱새우장 정식을 못 먹어봤기 때문에 오늘은 꼭 먹어보고 싶었다.


딱새우장 정식은 숙소에서 도보로 20분쯤 걸었을 때 나타났다. 제주에 오자마자 문을 닫은 식당이 많아서 오늘도 못 먹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나를 반겨주는 듯 환한 조명이 눈에 들어온 순간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서귀포시 양혜란식당. 관광지에서 벗어난 곳이다 보니 제주치곤 가성비가 좋았다. 딱새우장 정식 1인분에 12000원!


아무래도 혼자 다니는 여행이다 보니 1인분도 가능할까 살짝 걱정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빠르게 준비해 주셨다. 그리고 내 눈앞에 완성된 놀라운 결과물. 딱새우 다섯 마리는 모두 실했고 사장님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까먹으니 손쉽게 발라 먹을 수 있었다. 제육볶음과 생선구이도 맛이 좋았다. 오늘은 첫 식당부터 성공해서 인지 비가 오더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후 조금 더 걸어 서귀포시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나는 장기여행을 가게 되면 꼭 도서관을 들른다. 그리고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가 있기 때문에 여행 중이라 해도 완전히 연구를 덮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엎어진 김에 쉬어 가라고, 주말까지는 비가 온다고 했으니 아예 쉬엄쉬엄 연구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도서관도 들러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마주한 도서관의 모습은 생각보다 크고 좋아 보였다.

비에 젖은 서귀포시중앙도서관의 정문. 사진이 삐딱한 건 정중앙에서 열심히 포토타임을 갖고 계시던 아버님을 기다리다    지쳤기 때문...이라고 핑계 대고 싶다.


우선 종합자료실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3층에는 800번대를 제외한 책들이 있었고 2층에서 800번대의 문학서적을 만나볼 수 있었다. 시설은 전반적으로 깨끗하고 좋았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책이 너무 낡고 오래되었다는 점이다. 햇빛에 바래서 색이 변한 책들도 많았고 나의 관심사인 사회과학, 교육 분야의 서적 경우엔 90년대에 발행된 서적들 이후에 리뉴얼된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마 다양한 서적들을 구비하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겠지만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그래도 흥미가 느껴지는 책들을 몇 권 골라 정신없이 읽어 내려가다 보니 벌써 4시가 다 되었다. 그 사이에 숙소 사장님께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는데 환기하려고 살짝 열어놓은 창문 때문에 빗물이 들어올까 봐 내 방에 잠시 들어가겠다는 연락이었다. 그리고 나 대신 제습기까지 틀어두셨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방 컨디션을 세심하게 신경 써주시는 모습에 감사함을 느꼈다.


이후 공부를 좀 해야겠다 싶어 내려간 열람실은 마음에 들었다. 예약 없이 누구든 열람실을 활용할 수 있도록 열어놓고 있어 관광객인 내 입장에서는 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짐만 두고 장시간 자리를 비워두는 사람들만 없다면 누구나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열람실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열기도 상당했다. 그 틈에 나도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브레이크 타임 이후에 잠깐 들렀던 지하 1층 자판기 아메리카노도 맛이 괜찮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쯤 공부했을까? 예전부터 플래너를 함께 작성하는 모임을 통해 알고 지내던 리더님께 연락이 왔다. 이전에 내가 했던 말이 인상적이어서 인스타 피드에 올리고 싶은데 괜찮을지 묻는 연락이었다. 내 기준 인싸이신 리더님께서 내 말을 명언으로 생각해 주셔서 피드에 박제해 주신다니! 너무 영광이라며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기분 좋은 마음으로 공부를 더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하늘이 어두컴컴해지기 시작했다. 저녁도 챙겨야 하고 숙소도 걸어가야 하니 오늘은 이만 마무리하고 저녁을 먹으러 이동했다.


오늘의 저녁은 보말칼국수였다. 딱새우장 정식과 함께 꼭 먹어보고 싶은 메뉴였기에 빗길을 열심히 걸어서 식당에 도착했는데.. 이게 뭐람. 칼국수집은 미용실로 바뀌어있었다. 이럴 줄 알고 지도와 블로그 등 각종 최신 게시물들을 다 체크하고 갔음에도 식당을 가는 데에 실패했다. 뭐든 신속정확한 서울과는 달리 인터넷 업데이트는 한참 느리구나 싶었다. 빗줄기는 점차 굵어지는데 망연자실로 미용실 앞에 서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쯤 되면 오늘 꼭 보말칼국수를 먹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를 정도였다. 그렇게 폭풍검색을 마치고 도착한 보말칼국수집. 소한마리국밥도 궁금했는데 오늘은 꼭! 보말칼국수를! 먹고 싶었기에! 바로 주문을 하고 기다렸다.


보말칼국수에는 보말뿐만 아니라 매생이도 함께 들어있었는데 이게 원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원조든 아니든 어떠한가. 내 입맛에만 좋으면 그만이지. 워낙 입맛허들이 낮은 탓에 뭘 먹어도 잘 먹는데 보말칼국수도 마찬가지였다. 면발도 쫄깃하고 국물에 풀어진 매생이도 좋았다. 특히 보말은 고둥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주어로 바다 고둥을 보말이라고 한다더라. 어쨌든 보말은 쫄깃함 반, 텁텁씁쓸함 반인 식감이었다. 말이야 텁텁씁쓸함이지 비슷한 해산물들이 다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식감이니 거부감은 없었다. 식당을 한 번 실패하고 급하게 찾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고 나와서 만족스러웠다.


그리곤 숙소 근처 이마트를 들렀다 숙소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숙소 사장님께서 무료나눔 중이신 귤도 얻어갈 겸 안내데스크도 잠시 들렀다. 안내데스크에서 귤을 챙기고 나니 사장님께서 공들여 꾸민 공간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책장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던 책들을 빌려왔다.

요정님이 '단 한 권의 책'으로 꼽았던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내가 여행지에서 항상 읽었던 '어떻게 살 것인가'


저 책이 발행되었을 때부터 좋아했던 '포엠툰',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작가의 단편선인 '톨스토이 단편선'


모든 책이 마찬가지였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정말 반가웠다. 제주 이전 두 번의 장기여행에서 나는 이 책을 E북으로 꼭 읽었다. 모든 시간이 그렇지만 장기여행이라는, 어쩌면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곳에서 내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는 데에는 이만한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제주로 내려왔을 때에도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볼까 싶었는데 바로 내 눈앞에 나타났다는 게 정말 놀랍고 신기했다. (여담이지만 이 책의 저자는 논란이 있는 인물이지만 나는 그를 작가로서는 높게 산다. 마음 같아선 정말 글만 써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을 정도다.)


그리고 '포엠툰'은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만화가이자 에세이스트이신 정헌재 작가님의 데뷔작이다. 아마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 다니던 초등학교의 도서관에서 이 책을 처음 읽었다. 그때의 내 나이로는 이 책이 전하는 감성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정말 아름다운 마음들을 엮은 책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작가님 계정을 팔로우하며 종종 소식을 듣고 있는데 이렇게 첫 작품을 직접 만나게 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 외에도 '톨스토이 단편선'과 '위대한 개츠비'도 내가 평소에 무척 좋아하는 작품들인데 해당 출판사 버전으로는 읽어본 적이 없어서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함께 빌려왔다.


그리고 오늘 저녁부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정도 비가 계속 내린다면 내일도 바다나 다른 곳을 구경하기엔 어려울 것 같은데 뭘 해볼까 하다가 냅다 원데이클래스를 예약했다. 역시 우당탕탕 무계획에 실행력 갑인 나. 미술의 ㅁ도 모르는 손재주를 가졌지만 선생님과 함께라면 뭐라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림 원데이클래스를 신청했다. 늦은 저녁에 신청을 해서 예약이 확정될지 걱정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받아주셔서 내일은 동네 근처로 원데이클래스를 다녀올까 한다. 역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 변수들이 만들어내는 하모니를 언제까지나 즐기면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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