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혜원 Jan 11. 2023

3. 표선해수욕장, 월정리해수욕장, 대게라면

 우당탕탕 무계획 제주여행(3) 표선 이후 갑분 월정리행(230111)

어제처럼 갤럭시 워치가 보채기 전에 몸을 움직였다. 그리곤 (아주 조금) 뒹굴거리다 집밥을 차려먹고 머리를 정돈했다. 얼마 전 수강했던 프로그램에서 '열린 얼굴'이라는 개념을 배웠는데 나는 왼쪽이 '열린 얼굴'이란다. 그래서 가르마도 왼쪽으로 타주면 좋다는 강사님의 말씀에 요즘은 의도적으로 가르마를 왼쪽으로 탄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 30년 넘게 한 가르마를 타다가 한 순간에 바꾸려니 쉬울 리 없다. 관성이라는 건 가르마에도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관성 같은 마음, 혹은 생각은 어떤 것일지 고민했다. 부디 좋은 관성은 남겨두고 나쁜 관성을 끊어낼 수 있는 한 해가 될 수 있길 조용히 바랐다.


집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표선이었다. 표선을 고른 데에는 별 이유가 없었다. 지금 지내고 있는 숙소를 고르기 전 표선에 있는 숙소도 고민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름 귀에 익은 동네이기도 했고 버스로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일단 그곳부터 향하자 생각했다. 뭉그적뭉그적 나갈 준비를 하니 벌써 11시. 어제 미리 알아두었던 터미널로 향하니 표선으로 향하는 버스가 곧 출발할 예정이란다. 시작이 좋았다.

버스 타러 가는 길. 서울에 있는 집에서도 스타벅스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데 여기선 도보 5분이면 도착한다.


버스는 대략 1시간 정도 달렸다. 제주에서 버스는 처음 탔는데 수도권과는 다른 점들이 눈에 띄었다. 우선 초고령화 사회라는 것을 실감케 했다. 물론 출근시간이 지난 평일 오전이었으니 젊은 분들이 버스 탈 일은 상대적으로 적겠지만 노년층의 버스 승차가 압도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중 현금결제하시는 분들도 많았다. 또한 장애를 갖고 있는 독일 출신의 외국인도 버스에서 만났다. 도움을 드리고 싶었는데 기사님께서 쿨하게 태워주셔서 다행이었던 순간도 있었다. 마이너한 집단에서도 마이너에 속한 사람에겐 버스 한 번 타는 것도 큰일이라는 생각을 하니 잠깐 마음이 저릿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버스는 다양한 학교들을 지나쳤는데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들의 플래카드가 붙어있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학생의 실명뿐만 아닌 부모님 성함까지 모두 적혀 있었다는 것. 한 가족의 경사가 담긴 플래카드들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대략 1시간쯤 달렸을까? 버스 창가 사이로 가끔씩 보이던 바다에 기대를 갖고 표선에 내렸다. 그리고 조금 걷다 보니 표선해수욕장을 만날 수 있었다. 표선의 바다는 어떨까 궁금했는데 여긴 '장판 깔았다'는 표현이 적절한 듯싶었다. 낚시꾼들 사이에서 쓰이는 은어라고 하는데 정말 장판을 깔아놓은 것처럼 바다가 잔잔하고 조용했다.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는 아니었지만 그저 잔잔히, 그리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여긴 법환포구처럼 현무암이 많지 않아서인지 에메랄드빛 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해수욕장에 비해 푹푹 꺼지는 모래의 느낌도 참 좋았다.

그야말로 '장판 깔았던' 표선의 바다. 그나마 이게 좀 출렁이는 수준.  

 

에메랄드빛의 잔잔한 표선 바다를 보며 그네를 탔고 산책하며 모래 낙서도 했다. 그리고 '어른이란 무엇일까?'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요정님과 잠깐의 카톡 끝에 얻은 결론. 어른이 되는 순간은 예측되는 인생을 살아갈 때, 그리고 더 이상 무언가를 궁금해하지 않을 때라는 것.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얻는 게 있다면 분명 잃는 것도 있기에 어떤 것을 지키고 어떤 것을 버릴지 끊임없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 비록 완전한 결론은 아니지만 세상에 완전이 어디 있나. 끊임없는 고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대화를 나누며 들었던 노래. 더 네임의 어느새 어른.


그렇게 한창 물멍 때리고 있는데 옆에서 들려오는 한 아주머님이 다른 일행 분께 건네던 말씀. '월정리도 보러 갈래? 월정리 바다는 여기랑 또 달라.'  그 말씀이 귀에 닿는 순간, '네, 아주머님. 저 갈래요.' 마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바로 월정리로 향했다.


월정리로 가는 버스도 아까 내가 탑승했던 버스와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길을 찾으려던 순간 어디선가 멍멍! 소리가 들렸다. 앞발을 들면 내 키만 할 것 같은 대형 댕댕이가 나를 향해 광속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견주이신 할아버님께선 댕댕이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해 난감해하실 정도였다. 솔직히 살짝 겁났는데 막상 나한테 뛰어와선 킁킁대기만 했다. 마음이 좀 놓여 예뻐해 줬더니 금세 할아버님께 다시 돌아갔다. 내 최애 강아지인 짜리는 날 엄청 싫어하는데(...) 이 친구는 날 좋아해 주는 걸 보고 약간은 위안이 되었다. 내가 개들에게 완전히 추방당한 인간은 아니었구나.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버스를 탔다. 그리고 1시간 뒤 도착한 월정리.

 표선보다 크지만 꽤나 잔잔했던 월정리. 표선보단 좀 더 관광지스러운 느낌이 있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솔직히 월정리의 첫인상은 대단한 감흥이 들진 않았지만 급작스러운 행선지 변경치곤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표선보다 더 트여있는 분위기도 좋았다. 사실 감흥 없는 이유가 있었다. 오후 3시가 넘도록 점심을 못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후다닥 혼밥 가능한 집을 찾았으나 오늘도 퇴짜. 아니 포털사이트에선 영업 중이시라면서요..! 내적 오열을 해봤자 무슨 소용 있을까. 문 닫은 밥집을 뒤로하고 간판도 없는 대게라면집으로 들어갔다. 대게라면이라고는 하지만 가격이 좀 부담스러웠는데 다행스럽게도 맛이 좋았다. 특히 국물과 김치가 마음에 들었다. 김치는 할머님께서 직접 담그시는 건지 모르겠는데 정말 맛있었다. 적당히 익어서 라면과 찰떡궁합이었다. 브런치를 쓰고 있는 지금도 라면 생각을 하니 입에 침이 고인다. 물론 찐대게가 아니긴 했지만 이걸 라면에 넣어서 먹을 수 있는 곳이 몇 되겠나. 멜론 TOP 100을 1분 미리 듣기로 틀어둔 느낌이었던 조그마한 라면집. 월정리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하나 생겼다.

오후 3시가 넘어서 마주한 대게라면. 사실 뭘 먹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게 함정.


이후 편의점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아웃해서 월정리 바다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월정리의 검은모래해변도 구경했고 마침 해가 슬슬 떨어지고 있던 시간이라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바다의 모습이 참 예뻤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지금도 존재했다면 이렇게 예쁜 바다를 놓칠 수 없어서 허겁지겁 이젤부터 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역시 배가 부르니 같은 바다여도 예뻐 보이는 걸까?' 싶은 생각에 웃음이 났지만 뭐 어때. 나만 행복하면 됐지.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산책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부러 편의점 커피를 테이크아웃했다. 요즘 편의점 커피는 회전율만 높으면 퀄리티가 꽤 좋다.


숙소로 돌아가려면 아까 탔던 버스와 반대방향 버스를 타야 하는데 아무래도 빨리 도착하려면 급행버스가 훨씬 유리했다. 그렇지만 배차간격이 도와주지 않을 것 같아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5분 안에 급행버스가 도착했다. 제주는 교통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도권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고 시간여유가 많은 장기여행자라면 뚜벅이도 얼마든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교통이 갖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101, 102, 201, 202번 버스는 열심히 이용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아무리 비싸도 3000원을 넘지 않는 버스비용까지 마음에 들었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오늘의 일몰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그 일몰을 생각하며 반복했던 노래 두 곡. 싸이의 어땠을까. 그리고 아이유의 에잇.


내일부터는 당분간 제주에 비가 온다고 하니 동네투어를 해볼까 싶다. 내일도 잘 부탁해 제주!

매거진의 이전글 2. 법환포구, 서귀포터미널, 이마트 서귀포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