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일홈 Dec 10. 2018

선다방과 림보

#01. 당신도 LIMBO에 있나요?

어제 선다방이라는 티비 예능을 봤습니다. 선을 보면서 나누는 대화를 찍는 프로그램이에요. 저는 연애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즐겨봅니다. 연애를 다루는 프로그램은 연애 전 혹은 초창기에 볼 수 있는 감정의 꽃봉오리들을 주로 주제로 하기 때문이죠. 몇 해를 걸쳐 단단하고 뻣뻣해진 나무같은 게 아니라, 언제든 사그라들 수도, 만개할 수도 있는 간지럽고 풋풋한 상태의 꽃봉오리들 말입니다.


어쨌든, 거기서 '문과남'과 '이과녀'가 나오더라구요. '문과남'은 방송작가인데 역시나 말을 잘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뽐내는 식의 언변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적절한 질문을 하고, 대답을 이끌어내고, 또 그 주제에 관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로 이어지는...


'이과녀'는 IT기업에서 기획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자기 일에 자부심이 있으면서도, 에반게리온을 좋아해서 캐릭터 이름을 영어 이름으로 정하는 여자였습니다. 회사에서 영어 이름을 사용한다네요. 저도 그런 문화에서 한 번 일해 보고 싶습니다. 아무튼, 프로페셔널한 여성이자 영화나 만화 등에 관심이 많은 모습이 매력있어 보이더라구요.


문과인과 이과인이 대화할 때 꼭 나오는 주제가 있습니다.

"수학 잘 하셨어요?"

"저는 답이 딱 떨어지는 걸 좋아해요."

"아 전 뭔가 항상 애매~한게 좋더라고요."

두 주인공은 이런 류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도 문과인이라 애매한걸 좋아합니다. 문학, 역사, 철학, 사회학... 온통 답은 없고 문제제기만 하는 학문들. 열린 결말이라 사람들이 끊임없는 토론의 분수를 꽃 피우는 학문들. 그런데 말이죠. 저는 답이 딱 떨어지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0, 1, -1의 답을 구하는 일이랄지, 삼각형 각도를 구하는 문제랄지, 엑셀 수식을 세우는 일이랄지...


미드 섹스앤더시티의 미란다와 아들 브래디


최근에 'LIMBO(림보)'라는 단어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림보란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 세례를 받지 못했지만 착하게 산 이들이 가는 곳이라고 합니다. 제 최애 드라마 '섹스 앤더 시티'에도 미란다의 아들 브래디가 림보에 가지 않기 위해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프레이밍을 좋아합니다. '문과남', '이과녀'와 같이. 알아 듣기 쉬우니까. 분류하기 쉬우니까. 그렇다면 저와 같이 림보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어떡할까요. 여기도 속한 것 같지 않고 저기도 속한 것 같지 않은. 안정적인 회사가 좋으면서도 스펙타클한 모험에 대해 미련이 남아있는. 국어도 좋아하고 수학도 좋아하는.


선다방에서 문과남과 이과녀의 소개팅 결과는 긍정적이었습니다. 둘 다 호감 표시를 했더라구요. 싱글이 느끼는 외로움에 대한 공감과 비슷한 관심사, 그에 비해 상반되는 직업이 매력적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연애관찰일지는 거기까지겠지요. 그 이후에 그들이 관심사를 기반으로 사랑을 피워나갔을지, 아니면 성향적 차이로 인해 본질적인 답답함을 느꼈을 지가 사실 더 궁금한데 말이죠.


저 같이 애매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프레임으로 매력 어필을 하면 되는 걸까요? 내가 걷는 길이 또 하나의 프레임이 되게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일까요? 또 나에게 맞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나와 비슷한 사람? 나와 반대인 사람? 아님 나 처럼 림보에 빠진 사람? 선다방에 나가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프레이밍을 받아 봐야 할까봐요. 당신은 어떤가요? 어딘가에 속한 사람인가요 아님 속하지 않거나 혹은 못한 사람인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