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불특정 다수와 나에 대하여
어제 저녁,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침대에서 겨우 몸을 떼어 어기적어기적 나가보았습니다. 장소는 강남역. 집에선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라 제겐 꽤 심적 부담이 있었죠. 아니나 다를까 제가 마주한 것은 퇴근길 러시아워. 밀려오는 사람들... 밀려나가는 사람들... 도시의 밀물과 썰물 시간... 스트레스 그 자체였습니다. 열차가 선로를 지나는 끼긱대는 소리는 어찌나 불쾌한지. 모든 소음을 온 몸으로 흡수하고 있어 이어폰을 끼기에도 버거워, 내 유일한 친구 스마트폰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강남역 11번 출구가 사람 없는 시간은 언제일까요? 이 많은 사람들을 비집고 계단 위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는 왜 여기를 영업 장소로 삼으셨을까, 강남역에서 데이트 하는 남자들이 여자를 꼬시기 위해 꽃을 많이 사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하며 출구를 빠져 나갔습니다. 출구를 나가서 몇 미터를 채 걷지 않았을 때, 검은색 패딩을 입은 남자가 어깨를 세게 치고 나가는게 아니겠어요! 더욱 화나는 건 치고 지나간 사람은 본인이면서 저를 경멸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는 겁니다. 난 잘못한게 없는데, 왜 이 시간에 강남역에 와서 어깨빵과 멸시를 받아야하고, 왜 저 사람의 개인적인 짜증을 흡수해야하는지!
20대 초반에는 사람 많은 곳을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활기찬 분위기, 세상 속 다양한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 나도 이 사람들과 섞여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살아간다는 안도감 등 때문이죠. 도시를 살아가기 위해선 불특정 다수와 나 사이의 마찰 정도는 가볍게 넘어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체득한 상태였죠.
하지만 프랑스에서 몇 달간 살게 되면서 제 생각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라는 곳에서 트램을 타고 통학을 했던 저는,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통학길 러시아워를 겪었죠. 하지만 매너는 사뭇 달랐습니다. 저는 프랑스 사람과 아주 살짝만 부딪혀도 "Pardon(빠흐동)"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실례합니다 정도로 의역될 거 같습니다. 그래서 덕분에 저도 빠흐동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이웃끼리 안부를 묻는다던지, 학교에서도 모르는 사이라도 눈이 마주치면 인사한다던지, 뒷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것 등등 한국에서 배웠던 도시 매너와는 매우 다른 문화를 접하면서, 재사회화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이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적응기를 거쳐 다시 한국화되었지만요.
이제 저는 사람 많은 곳을 지극히 싫어합니다. 회사를 다닌 후로 불필요한 타인과의 마찰은 되도록 줄이고 싶어진 것 같습니다. 저도 사람을 싫어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불특정 다수들은 왜 이리 저에게 가혹한 걸까요. 그렇지만 정말 웃긴 건 저도 그 누군가에게 불특정 다수이겠죠? 저도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라는 핑계로,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기운을 내뿜었겠죠? 죄송해요. 우리 서로 조금씩만 상냥해져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