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새 것도 헌 것이 된다.
BBC 다큐 '소비를 일으키는 자들'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안 보셨다면 강력 추천드립니다. 내가 하는 소비가 과연 나의 주체적인 소비인지 아닌지 생각해보게 하는 다큐입니다. 사실 주제가 진부한 패러다임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다큐의 매력은 언론인 Jacques Peretti가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을 찾아가 팩트 폭행을 날리는 데에 있습니다. 전 한낱 소비자로서, 이 언론인이 정말 멋있게 보이더라구요.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Peretti가 애플 관계자를 찾아가 나눈 대화입니다. 애플은 세계 1, 2위를 다투는 브랜드 가치와 팬덤을 보유한 글로벌 기업이죠. 그럼 아래에 다큐 내용을 조금 발췌해 보겠습니다.
<Peretti와 애플의 인터뷰>
Peretti : 아이폰은 발전 중인가요?
Benedict(애플 기술 분석자) : 이런 기기들은 아직 발전할 가능성이 커요.
Peretti : 사실인가요? 애플의 디자이너였던 댄 크로우 씨는 아이폰 발전은 이미 정체기에 접어들었다고 말했어요.
Benedict : 새 아이폰의 64비트 칩은 같은 배터리지만 두 배로 일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슬로모션 기법으로 비디오 촬영도 가능하죠. 지문 인식도 되고요.
Peretti : 제가 아이폰 5s를 사려고 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왜 아이폰 5s를 사려는 건지 물어봤어요.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신기술 때문이라고는 말 안하던데요.
Benedict : 그걸 알 필요는 없어요. 그걸 다 알 필요가 없죠. 어떤 점이 개선됐는지 알아보고 그걸 평가하는 건 소비자의 일이 아니에요.
Peretti : 아이팟에 대해 얘기해볼까요? 아이팟이 처음 나왔을 때 교체할 수 없는 배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죠?
Benedict : 배터리를 교체할 수 있게 만들려면 디자인을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하죠. 배터리가 들어갈 플라스틱 케이스를 만들어야 하고요, 제품 안에 들어갈 플라스틱 소켓도 개발해야 하죠. 그리고 탈부착 가능한 케이스도 필요하죠. 그러면 배터리 때문에 많은 부품을 추가해야 하고 그 부품들이 들어갈 공간을 위해 다시 디자인 해야 하죠.
Peretti : 소비자가 원하는 얇은 휴대전화에는 교체가 안 되는 배터리를 써야 한단 말인가요?
Benedict : 제 생각에 그건..
Peretti : 애플이 일회성의 소비를 조장하지 않았나요? 매일 조금씩 새로운 것이 등장하게 하여 소비자가 끊임없이 가장 새롭고 더 빠르고, 더 얇은 것을 추구하게 해서 쓰고 금방 버리는 문화를 조장하지 않았나요?
(이 부분에서 Benedict 머리 긁적이기 시작함)
Benedict : 그런 주장은 현실에 맞지 않아요. 우리가 부유하지만, 소비는 적고 천천히 살아갈 수 있었을 때, 인구의 80-90%가 농부였을 때나 어울리는 말이죠. 그런 삶은 이미 지나갔고, 요즘 이삼십대의 삶은 소비와 큰 연관이 있어요. 우리의 삶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변화와 발전이 중요합니다.
Peretti : 그럼 회사들은 계속해서 신제품을 출시하고 우리는 그때마다 쓰던 물건을 버리고 새로 사는 것이 옳다는 말씀입니까?
Benedict : 그럼 관점을 달리해 봅시다. 회사들은 더 나은 제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텔레비전을 볼 수 있고 15년, 20년이 지난 후에도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회사에선 끊임없이 더 나은 제품을 개발하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당 다큐는 2014년에 제작된 점을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일회성 소비를 주장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애플 측은 대답을 회피하고 논점을 바꿉니다. 기업의 입장은 다를 수 있습니다. 기업과 그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오로지 목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소비가 기업의 이익만을 비대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행복해지고 더 나아가 세계 이웃들 모두 행복해지는 소비인지.
전 오늘 애플공식수리센터인 유베이스에 가서 아이폰6s의 배터리를 교체했습니다. 아이폰 배터리 게이트로 인해 아이폰이 배터리 교체를 3만 4천원에 해주는 정책을 올해 안까지 시행하겠다고 밝혔죠. 그래서 그런지 수리센터는 대기 시간이 3시간이나 됐습니다. 다행히 저는 홈페이지 예약을 하고 갔기에 대기 시간은 적었습니다. 홈페이지 예약도 쉽지는 않았지요. 아니나 다를까, 제가 한 시간 가량 센터에 머무르면서 두 명의 고객이 안내 직원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싸우는 이유는 주로 너무 긴 대기 시간과 불투명한 수리 가능 여부, 너네는 기다려라 어쩔 수 없다라는 식의 응대였습니다.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에서 나온 "새 것도 헌 것이 된다"라는 대사가 떠오릅니다. 최근에 나온 아이폰XS도 헌 아이폰이 됩니다. 저는 신제품에 목 매는 소비를 이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소비인지 고민해 봐야한다고 봅니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현대 자본주의 태세가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지 의심해 봐야한다고 봅니다. 저도 아이폰 참 좋아합니다. 하지만 내가 왜 좋아했는지, 왜 그 제품들을 소비했는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할 거 같아요. 드디어 배터리를 교체한 아이폰 6s는 몇 년은 더 사용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