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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홈 Aug 10. 2021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불가리아 소녀

영어 말하기 어플에서 만난 이 불가리아 친구에 대해서는 꼭 글로 남겨두고 싶다. 이 어플은 튜터의 사진, 별점, 자기소개 등을 참고하여 수업을 신청할 수 있다. 보통 여자 튜터들이 인기가 많아 금방 빠지는데, 더군다나 별점까지 높으면 무조건 사전 예약을 해야 수업을 할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어느 운이 좋은 날 인상도 좋으면서 별점까지 높은 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나의 취미가 글 쓰는 것이라는 것을 밝히자 그녀와의 공감대가 급격하게 형성됐다. 그녀는 불가리아 태생으로 현재는 폴란드에서 영어 교사 일을 하고 있고,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영어를 가르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는 흥분 상태로 서로 좋아하는 작가 이름을 마구 내뱉었는데 그중에 교집합이 있었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


우리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왜 좋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부터 시작해서 마치 이 나무 저 나무를 경쾌하게 옮겨 다니는 종달새처럼 다양한 주제를 오갔다. 그녀에게 정말 인상 깊었던 점은 그녀가 완벽한 리스너라는 점이었다. 대게의 튜터들이 보이는 사무적인 태도와 달리 나의 생각과 감정에 진심으로 귀 기울였다. 그녀의 성격이 원체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나와의 대화가 그녀의 흥미를 이끌어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근 몇 년간 나눈 대화 중에 가장 편안하고도 진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이후에도 여러 번 그녀와의 수업을 가졌다. 그녀는 자신이 기고하는 웹진의 주소를 알려주기도 하여 나는 그녀가 쓴 글을 읽고 이후 그녀와 토론을 나누기도 했다. 그 주제 중 하나는 "다자 연애(Poly Amory)"였는데 내가 떠들기 딱 좋아하는 소재였기에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다.  젊은 여자 둘이서 서로의 연애사에 대해 이야기도 빠트릴 수 없었다. 서로의 첫사랑부터, 장거리 연애에 대한 생각, 그녀의 멕시코 남자 친구와 그 가족 이야기 등.. 몇 번 대화를 해보지도 않은 사람, 그것도 불가리아인에게 이런 깊은 내면의 생각과 감정까지 꺼내 보일 수 있다는 점이 내 안의 무언가를 일깨웠다.


나는 튜터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항상 그곳의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을 안부 차 묻곤 하는데 불가리아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감염자도 감염자지만 안 좋던 경제가 더 안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수도 소피아에 상점들에 락 다운이 가해졌지만 비밀리에 영업을 강행하는 곳들이 꽤 된다고 했다. 불가리아의 수도가 어디인지도 몰랐던 내가 그녀와 불가리아의 경제 상황을 염려하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얼마나 좁은 곳일까 하는 두려움이 문득 들었다. 나는 매일 같이 얼굴을 보는 회사 사람들과 그 어떤 유의미한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있다. 반면 나와 전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불가리아인과는 둘도 없는 소통을 한다. 매일매일 익숙한 대로 살아가는 이 일상 때문에 내가 손에 쥘 수 있는 수많은 보석들을 놓치는 것 아닌가 싶어 마음속에 걱정이 일었다. 그녀는 상황이 나아진다면 페루로 갈 계획이라고 했다. 요즘 그녀가 바쁜지 수업 일정이 도통 없다. 어서 그녀와 다시 사랑, 인생,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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