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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일홈 Apr 27. 2021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나를 정의하는 법

[매주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대화하기 1]

나는 꾸준히 영어 원어민과 화상 대화를 하고 있다. 벌써 일 년 반은 지난 것 같다. 처음엔 모종의 목적을 갖고 시작했지만 이젠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이 대화 자체가 너무 즐겁고 유익해서 지속 중이다. 그 주에 미드나 영어로 된 예능에서 들은 표현을 사용할 때면 그렇게 자존감이 높아질 수가 없다.


여태껏 나와 대화한 원어민들을 세보면 70명 정도는 될 거 같다. 영어 연습을 하는 것 자체만 해도 나에게 충분한 효익이었지만 내가 진정한 재미를 느낀 부분은 바로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과의 "소통"이었다. 얼마 전 내가 구독하는 작가 정문정은 직장인이 자기의 바운더리를 넘어서려면 퇴근 후에는 직장 동료를 만날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인사이트를 넓히라 했다. 그 말이 한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는데, 다름 아닌 내가 해오던 원어민과의 대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튜터로 만난 원어민 대부분은 사실 서구권 출신이지만 동남아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칠린(chillin)하는 중년이거나,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영어를 가르치며 여행도 하는 젊은 욜로(yolo)족이었다. 그들의 삶은 자유롭고도 불안정했다. 태국 천혜의 자연을 즐기며 살다가도 코로나로 인해 생활비를 걱정하며 알바를 늘리기도 했다. 심지어 아이가 있는 튜터도 있었는데 아이들과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는 모습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나는 언젠가 외국에서 살겠다는 꿈을 마음속에 품고 살았는데, 그 꿈이 죽지 않도록 원어민 튜터들이 끊임없이 심폐소생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단을 내리진 못한다. '내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다면', '주변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조금만 많았다면 당장 떠났을 텐데' 같은 핑계들이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내가 지금 누리는 것들이 충분히 소중하고 가치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면  이내 현실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물론 매너리즘에 빠진 튜터들도 많았다. 그저 시간을 채우기 위해 정해진 질문만 읊으며 소통한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은 그런 세션들. 그래도 좋은 튜터들도 많았는데, 그중에 정말 나랑 잘 맞는다는 느낌의 튜터들을 찾을 때면 기분이 정말 좋다. 마치 소개팅을 성공한 기분이랄까. 매주 새로운 사람을 만나다 보니 어떤 유형의 사람과 내가 잘 맞는지를 글로벌 관점에서 알게 되는 듯했다. 덤으로, 간혹 잘생긴 튜터를 만나면 설레기도 한다. 하지만 공부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너무 떨려서.


몇몇 잘 맞는 튜터들과는 한 번의 세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기도 했다. 한 번은 내가 친구들과 대판 싸우고 나서 수업을 갖게 된 튜터가 있었는데 어찌나 공감을 잘해주던지, 심리 상담을 받은 느낌이었다. 다들 그런 느낌 알지 않는가? 친한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상담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속 시원하다는 것을.


한편 굉장히 논리적이고 차가운 타입의 튜터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내가 문법 오류가 있을 때마다 바로바로 지적하는 스타일이었고, 그 점이 나쁘지 않았다. 나 또한 대화를 하면서 억지로 공감해주는 감정 노동을 할 필요가 없어서 아주 편해 꽤 여러 번 세션을 진행했던 튜터다. 그는 내게 어떤 주식을 사야 하는지, 구글 같은 사이트는 내 데이터가 추적당하니 어떤 사이트를 써야 하는지 등을 알려줬던 아주 실용적인 타입의 미국인이었다.


대부분의 대화는 "나는 한국에서 억압받으며 공부만 한 사람인데 세계를 돌아다니며 멋진 풍경을 즐기며 글 쓰며 살고 싶다"라고 말하면 튜터는 "그래 포기하지 말고 계속 노력해봐 인생은 짧아" 로 결론지어졌다. 하지만 저 말을 수십 번 내뱉다 보니 내 자신을 저 한 문장으로 정의 아니, 한정 짓는 것 같다는 생각에 슬퍼지기도 한다.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나를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면? 과연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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