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걱정 순삭 #00

포기하면 편하다. 일단 가보면 행복해질거야

by 정인
일단 가봐. 행복해질거야


바르셀로나 까미노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장님이 나의 온갖 질문들에 대해 단호한 답을 주셨다. 이러쿵 저러쿵 말 필요 없고, 일단 가보면 지금 이런 걱정들이 얼마나 쓸데없었는지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부처님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지만, 믿지 않았다.


마드리드 한국인 순례자 숙소는 순례를 마치고 온 사람과 출발 전의 사람들이 함께 머물고 있었다. 거기서 앞머리가 희끗하신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온몸에 지친 기색이 연연한 그분은 순례길 절반도 못가 중단하고 오셨다고 했다. 왜냐, 길에서 쓰러지셨기 때문이었다! 쓰러지기 며칠 전부터 뭘 먹으면 왠지 속이 좋지 않아서 소화제를 먹고 걸었다고 했다. 햇볕 아래 꾸역꾸역 걸어가던 어느 날 정신을 잃고 말았다. 때마침 지나가던 순찰차가 발견한 것은 길 가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는 동양인이었다. 부르고스의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고 한국의 가족에게 연락이 갔다. 식구들이 놀라 부랴부랴 한국행 비행기를 예약했고, 아저씨는 내일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 거야. 내가 아무도 없는 숲 속 오솔길 같은 데서 쓰러졌으면 그냥 죽었겠지..."


종교가 없는 나는, 꽤 심각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평온하기만 한 아저씨의 표정이 의심스러웠다.


"하나님이 나한테 내 몸이 어떤지를 보게끔 해주신 거지. 그걸 알게 되는데 며칠밖에 안 걸렸다는 게 나한테는 복이야"


남은 길을 다시 완주하러 오실 거냐고 여쭈었을 때, 아저씨는 또 그 평온한 미소를 띠며 '걸어보니 완주가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일단 가봐. 알게 될 거야'라는 결론. 역시나 믿지 않았다. 길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던 분이 말씀하시니 걱정이 더욱더 증폭되었다. 해탈한 듯한 미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한지도 몰라!




인터넷을 바다에 비유하곤 한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을 향해 걸어가는 스페인 순례길 여행을 알게 된 것은, 바다를 헤엄치다 우연히 발에 걸린 미역 줄거리를 발견한 것 같은 일이었다. 어떤 계기가 딱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광활한 인터넷 바다에서 어쩌다 걷어올린 흥미로운 어떤 것이었다. 배낭을 등에 지고 한 달 여를 걷는다는 것은 어쩐지 고행 같기도 하고 극기훈련 같기도 했는데, 누군가가 올려놓은 사진 속의 사람들 표정은 하나같이 행복해 죽겠다는 듯이 밝았다. 그 뒤로 펼쳐지는 파란 하늘의 스페인 풍광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홀린 듯이 결정했다. 내 생일날에 딱 맞춰 생장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듯 생일에 순례를 시작한다는 것이 생각만 해도 의미심장하고 멋졌다.


하지만, 드넓게 펼쳐진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멋진 상상으로 설레는 것은 잠시, 출발 직전까지는 내내 걱정, 불안, 혹시 모를 점검 등으로 점철된 시간을 가졌다. 순례길 여행 준비의 초기 작업은 까미노 친구들 연합 카페에 가입하고 밤새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 같은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여자 혼자 가는 사람 있냐, 날씨는 어떠하냐, 옷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냐 등의 질문이 게시판 가득했고, 짐을 이만큼 쌌는데 한번 봐달라며 물건들을 늘어놓은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천사 같은 분들이 무엇을 넣고 무엇을 빼라며 친절한 답변을 남겨주었다. 그 지역 버스 노선과 시간표까지 훤히 꿰고 있는 답변도 많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 목록에서 내가 쓴 것인가 움찔할 정도로 내 심정을 쏙 빼다 적어놓은 글들을 읽느라 밤을 새우곤 했다. 더불어, 없던 걱정도 나날이 늘어갔다.




순례길 ‘경험’을 밝히고 나면, 주변인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받게 된다. 최근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방송에 자주 등장하면서 질문이 더 많아졌다. 주변인들은 실제로 출발 계획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많은 것을 물었다. 어떤 신발, 어떤 옷, 어떤 양말부터 시작해 어떤 속옷을 들고 가는가까지, 어느 곳에서 자는가, 얼마큼이나 걸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갔는가, 갔다 오면 뭐가 달라지는가까지. 질문의 한계라는 것이 없다. 친절한 대답과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버무려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내다 보면, 나 역시 같은 결론을 내놓게 된다.

일단 가보면 알게 될 거야.
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다녀오고 나서 보면, 그 ‘쓸데없는 생각’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이었는지를 깨달으며 걷는 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청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별것 아니었고, 없어도 괜찮으며, 혹은 없는 것이 내 삶을 더욱 가볍고 상쾌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물건이든, 어떤 생각이든, 사람과의 관계든...


포기하면 편하다. 그것을 하나하나 깨달으며 걷는 길이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